달리기를 아주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포니 테일을 좌우로 살랑살랑,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며 뛰던 뒷모습이 생각나네요. 숨차게 달리는 건 그 아이였는데 이상하게 구경하는 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일쑤였어요. 딴에는 제법 설레였던 열두 살의 짝사랑. 하지만 먼저 말을 걸 만큼 배포가 크지 못했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혼자 뺨을 발그레 붉히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열두 살이니까요. 열두 살엔, 다들 그러지 않던가요?
그런데 샘(자레드 길먼 분)이란 아이는 저와 다르더군요. 1년 전 교회 연극을 준비하는 분장실에서 수지(카라 헤이워드 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뭔가 달랐습니다. 대뜸 “바로 너!” 하고 손가락으로 수지를 가리키는 당돌함이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 후 1년 동안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는 등 로맨티스트의 면모는 남달랐습니다. 결국 부모님 몰래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는 두 사람. 열두 살 꼬마들 주제에 진짜 연애를 합니다.
당황한 건 어른들입니다. 청소년 스카우트 캠프에 참가하려고 뉴 펜잔스 섬에 들어온 샘이 감쪽같이 사라진 걸 뒤늦게 발견한 선생님(에드워드 노튼 분). 얼른 경찰에 신고합니다. 섬의 경찰 소장 샤프(브루스 윌리스 분)가 샘을 찾아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시작해요. 경찰이 섬 반대쪽 수지네 집에도 들렀을 때 그제야 수지 부모님(빌 머레이 분, 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겨우 열두 살 먹은 딸이 남자 때문에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사내아이가 고아라는 사실까지도 알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래저래 축복받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는 겁니다.
자, 이제 열두 살 연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님과 선생님과 경찰아저씨를 피해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사랑의 도피는 결국 하나도 아름답지 않게 끝나고 마는 걸까요?
<문라이즈 킹덤>은 열두 살 아이들의 첫사랑 영화입니다. 어드벤처영화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가족영화였다가 결국엔 성장영화로 마무리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웨스 앤더슨 영화’입니다. 왜, 한 감독의 이름이 곧 한 장르의 명칭이 될 때가 있잖습니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그냥 ‘홍상수 영화’라는 장르로,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그냥 ‘왕가위 영화’라는 장르로 구분하듯이 말이죠. 이런 영화들엔 다른 감독이 흉내 낼 수 없는 그 감독만의 일관된 ‘무엇’이 또렷하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럼 ‘웨스 앤더슨 영화’가 드러내는 또렷한 특징이란 건 뭘까요?
저는 먼저 ‘삽화처럼 예쁜 화면’을 첫 번째 특징으로 꼽습니다. 그는 마치 동화책의 삽화를 스크린에 옮겨 놓은 것처럼 늘 예쁘고 귀엽고 따뜻한 비주얼로 보는 이를 흐뭇하게 만들죠. <로얄 테넌바움>(2001)의 진한 빨강,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2004)의 눈부신 파랑, <다즐링 주식회사>(2007)의 따뜻한 노랑에 이어 <문라이즈 킹덤>의 귀여운 카키색과 복고풍 주황까지. 촬영장에서도 언제나 슈트만 고집한다는 멋쟁이 패셔니스타 웨스 앤더슨의 탁월한 색채 감각은 다른 감독들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재능입니다.
매번 ‘철부지 어른들의 동화’를 들려주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지요.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개 한 가족. 그중에서도 이리 깨지고 저리 흔들리는 ‘결손가정’이 모든 웨스 앤더슨 영화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엄마 아빠 사이는 이미 오래전에 소원해졌고(<로얄 테넌바움>) 다 큰 자식들은 헤어진 아빠를 찾아나서거나(<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 연락 끊긴 엄마를 찾아나섭니다(<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샘은 고아이고 수지 엄마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어요. 하지만 웨스 앤더슨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그런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로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보여주지요.
우리가 웨스 앤더슨 영화의 관객이 된다는 건 곧 그가 만들어낸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삽화처럼 예쁜 화면’ 속에서 ‘철부지 어른들의 동화’를 함께 써내려간다는 뜻입니다. 꼭 한 번 입어보고 싶었던 스타일의 옷을 입고,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었던 디자인의 집에 살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어떤 모험을 함께 떠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라이즈 킹덤>은 지금까지 한번도 웨스 앤더슨이 만들어낸 가족의 일원이 되어본 적 없는 관객들의 소매까지 단숨에 잡아끄는,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로맨틱한 ‘웨스 앤더슨 영화’입니다. 우리 모두 한때는 열두 살이었고 우리 모두 한때는 샘과 수지처럼 모험을 좋아하는 아이였다는 걸 새삼 떠올리며 씨익, 미소 짓게 만드는, 명랑하고 앙증맞은 첫사랑 영화입니다.
포니 테일을 좌우로 살랑살랑,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며 뛰던 그 아이의 뒷모습이 다시 생각나네요. 저도 샘처럼 용기를 냈어야 했던 걸까요? 그랬다면 제 초등학교 5학년의 여름이 조금 달랐을까요? 샘과 수지가 함께 보낸 그해 여름처럼 평생 잊지 못할 예쁜 추억 하나 가슴에 품게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