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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당신이 만나야 할 문화유산작은 판에 담긴 거대한 의미, 농경문청동기
한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13년 02월호

국립중앙박물관 청동기실 한 가운데엔 작은 청동판이 매달려 있다. ‘농경문청동기’라고 불리는 이 유물은 13cm 정도의 작은 크기인데다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초라한 모습이라 쉽사리 눈길을 끌지 못한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농경사회가 발달하면서 종교와 권력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알려주는 단 하나밖에 없는 유물이라면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청동기시대 알려주는 유일한 유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모습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특정한 문양이나 그림이 새겨진 유물은 그 시대의 정신세계와 상징체계를 알려주는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 농경문청동기는 대전 부근에서 출토됐는데 이 지역을 포함한 금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아주 특수한 청동기들이 만들어지고 무덤에 부장됐다. 한국에서 청동기시대는 농경발달, 특히 벼농사의 보급과 그에 따라 농경사회가 점점 확대되면서 부의 편중과 권력집중이 이뤄지면서 일정한 지역의 지배자가 나타난 시기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표현하기 위해 일반인들은 감히 가질 수 없는 귀중한 물건을 몸에 장식해 드러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이러한 위세품 중 특히 권력자들이 선호한 것이 청동기였다. 지금 박물관에서 보는 청동기들은 초록색 녹이 덮여있지만 처음 만들었을 때는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 위엄을 나타내는 데 적임이었을 터.


청동기 제작과 보급은 초기엔 중국 요령성 지역, 길림성 지역, 한반도가 동일한 양상을 보여 일부 학자는 이 세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우리 역사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영역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청동기문화가 한국만의 독자적 특징을 보이면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청동유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 유물이 발견된 대전을 비롯한 금강 유역이고, 이 문화를 가리켜 ‘한국식 청동기문화’라 한다.


기원전 5~4세기 금강 유역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들은 우연한 발견이나 학술조사를 통해서 발굴됐다.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하는 것은 청동검과 청동창과 같은 무기들과 끌, 도끼 같은 공구들이다. 만들기도 쉽고 실생활에서도 유용하기 때문에 널리 제작돼 작은 박물관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 그에 비해 농경문청동기와 같은 종류의 유물은 지금까지 단 세 점만 발견됐고 모두 금강 유역의 무덤에서 발견됐다.


당시 한반도 지역의 농경사회를 지배하던 자들은 점과 선을 많이 사용해 기하학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무늬를 선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문양들은 해, 별, 번개 등 당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숭배하던 자연현상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무늬의 선호 때문인지 현재 남아 있는 청동유물에 사실적 묘사가 새겨진 것은 극히 드문데 이 농경문청동기에는 당시 농경과 관련된 그림이 정교하게 새겨져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원래 이 유물은 방패형 동기라고 불리는 청동기의 한 종류다. 방패형 동기는 아래쪽이 둥글거나 갈라진 모양을 하고 위쪽에 끈을 연결할 수 있는 구멍들이 일렬로 뚫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방패형 동기는 장식이 간단하고 형태도 간소해 청동기 초기 형식을 띠는 것으로 생각된다. 아산 남성리에서 발견된 유물은 훨씬 복잡한 모양인데 위쪽엔 가지가 양편으로 길게 나와 끝에 방울이 달려 있고 아랫쪽은 양편으로 갈라져 길게 뻗쳐있는 형상이다. 주목되는 것은 양편에 달려 있는 방울이다.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금속성의 소리를 내는 청각효과까지 겸비한 청동방울은 한반도 초기 종교의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아직까지 샤머니즘의 전통을 잇고 있는 무당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도구로 이어져 왔다.


농경사회,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 드러나


농경문청동기는 형식적으로 이 두 유물 중 중간에 속한다. 윗편에는 일렬로 6개의 구멍이 있는데 양끝에 위치한 구멍이 많이 마모돼 주로 여기에 연결하는 끈을 걸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의 양쪽 면에는 모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쪽 면에는 밭을 갈고 있는 남자와 하반신이 없어졌지만 괭이를 치켜들고 있는 사람,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사람 이렇게 세 명의 농경활동이 새겨져 있다. 완전한 형상이 남아 있는 남자는 두 손으로 따비의 자루를 잡고, 한 발로 날을 밟고 있다. 따비는 농사의 첫 단계인 씨앗을 밭에 뿌리는 파종을 하기 위해 흙을 일굴 때 사용하는 도구다. 따비의 아래에는 밭이 표현돼 있다. 사각형태의 밭은 10줄 정도의 밭고랑을 표현하는데 실제로 이러한 형태의 청동기시대 밭유적이 진주에 있는 대평리 등에서 많이 발견돼 널리 발달한 농경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항아리에는 격자 모양이 표시돼 있는데 실제로 집자리 유적에서 운반 등을 위해 끈을 묶은 흔적들이 있는 토기가 많이 발견돼 흥미롭다. 결국 이 면엔 농사의 시작을 상징하는 밭갈기와 수확을 상징하는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장면을 통해 풍요를 기원하는 염원을 표현했다고 보여진다.


반대편에는 새가 그려져 있는데 두 갈래로 벌어진 나뭇가지 끝에 서로 마주보며 한 마리씩 앉아 있다. 새는 한국의 고대 종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동물이다. 선사시대부터 곡식을 물어다줘 마을의 풍요를 가져오고 하늘의 절대자 혹은 조상신과 지상의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 새에 대한 숭배는 삼국시대까지 이어져 새를 표현한 제사와 의식에 관련된 수많은 유물이 남아 있다. 또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새를 표현한 장대는 솟대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농경문청동기는 우리가 아는 가장 오래된 솟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유물의 여러 그림을 조합해보면 결국 농경문청동기는 기원전 4세기경 대전 지역의 농경사회를 장악한 지배자가 당시 모든 구성원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에서 사용하는 제례도구였다가 그가 죽자 평소에 착용했던 여러 귀중품과 함께 부장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선사시대의 금속기 제작기술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 전통사회의 근간이 되는 농경에 대한 여러 면을 보여주는 유일한 유물로서 우리나라 선사문화를 대표하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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