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동네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작은 중학교가 있다. 오후 즈음에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 창밖을 내다보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너무나 맑고 순수한 모습들이다. 참 사랑스럽다.
나는 유난히 소년을 좋아한다. 특히 중학교 2학년 학생은 너무나 예쁘다. 중학 1학년생은 아직 너무 어려서 초등학생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고 중학 3학년생은 벌써 터프한 ‘남자’의 느낌이 슬슬 나려고 한다. 고등학생이야 말할 것도 없고···. 중학 2학년생이 제일 사랑스럽다. 인간으로서의, 남자로서의 모습이 하나 둘 갖추어져 가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뭔가 어설프고 엉성한, 그런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엉거주춤한 모습이 보기에 약간 애처러운듯 하면서도 나름 대견해 보이는 것이다. 평생을 통털어 인간의 가장 예쁜 ‘소년’의 모습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어른들은 모두 소년, 소녀를 사랑한다. 잃어버린 자신의 피터 팬에 대한 노스탤지아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창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순수한 아이들이 정말 잘 자라야 할 텐데”라고 하는 진부하고 당연한 생각이 든다. ‘잘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동네 이 중학교 정문에는 잘 깍은 큼지막한 돌덩어리에 다음과 같은 교육 목표가 새겨져 있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자.” 다른 학교들의 교육 목표도 비슷할 것이다. 홍익인간이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이라고 하지만 실제 일선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대체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쓸모 있는 인간이 되도록 하는 데 있다. 좋은 취지이다. 하지만 인류가 부러워하는 문명을 일궈낸 고대 그리스의 교육 목표와 비교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교육관이 아닐 수 없다.
미(美)에서 심미(審美)로의 이행
고대 그리스인들의 교육 이념은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즉 아름답고도 선량한 영혼의 인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칼로카가티아는 미를 뜻하는 칼로스(Kallos)와 덕 또는 선을 뜻하는 아가토스(Agathos)의 합성어로, 우리말로는 글자 그대로 선미(善美)라고 번역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고대 그리스인들은 미를 진(眞), 선(善)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진선미 일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미란 진과 선이 감각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오는 어떤 인식적 경탄이자 선한 의지를 자극하는 도덕적 쾌감이었다. 그러니까 고대의 미, 칼로스는 감각적인것 보다는 이성적인 것에 더 가까웠으며 따라서 기하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동반되는 어떤 것이었다. 중세 기독교 사상이 가세되면서 미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보다 공고해졌고 근대 이전까지 확고한 전통이 됐다.
근대미학의 정초자로 일컬어지는 칸트(I. Kant)에 이르러 미는 진과 선과의 오랜 밀회를 끝낸다. 칸트는 미를 진, 선과 무관한 독자적인 것으로 새롭게 정의내렸다. 과거 진, 선이라는 타 가치를 내용으로 갖던 미는 이제 자율적인 것이 되었으며 내용과 무관한 단순한 형식의 문제로 바뀌었다. 아울러 객관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그저 보는 이의 취미판단에 따른 주관적인 것이 되었다. 인간 외부에 있던 칼로스는 이제 인간의 마음에 따른 것, 에스테틱(Aesthetic)이 된 것이다. 바로 미에서 심미(審美)로의 이행이다. 이렇게 해서 고대 미학과 결별한 새로운 미학이 열린다. 객관주의 미학 대신 주관주의 미학이, 내용미학 대신 형식미학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세계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근대 이후 이제 사람들은 예쁜 것을 착한 것과 연관 짓지 않으려고 하게 되었다. 현대예술에 와서는 이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오늘날 도덕적인 것을 훼손하는 내용의 소설을 책망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 오히려 윤리적인 것을 강조하는 소설은 고리타분하고 케케묵은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선함을 담보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은 공허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가? 아직도 우리는 ‘추악’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추를 악으로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는 선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미를 진이나 선에서 분리시킬 때부터 인간의 심성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참됨이나 선함을 담보하지 못하는 아름다움이라면 그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하찮고 공허한 것이란 말인가?
얼마 전 우리 청소년의 윤리의식과 관련해서 대단히 우려스러운 한 통계자료를 접했다. 설문조사에서 고등학생 10명 중 4명이 “10억 원이 생긴다면 1년간 감옥행도 무릅쓰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남의 물건을 주워서 내가 가져도 괜찮다”고 답한 학생은 10명 중 무려 6명이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교육이 문제다. 아름답고도 선한 인간! 그 얼마나 훌륭한 인간이란 말인가?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라면 칭찬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제 아무리 아름답고 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해도 영어실력이 부족하고 특별한 자격증이 없는, 소위 스펙이 부족한 젊은이라면 칭찬은 커녕 낙오자 취급을 받기 딱 좋다. 뒤집으면 좀 못됐어도 능력이 뛰어나다면 인정받는다는 얘기다.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이다. 쓸모 있는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우리 교육. 고대 그리스와 비교한다면 국격이 말이 아니다. 칼로카가티아까지는 아니라도 우리도 이제는 스펙과 취업, 사회에서의 출세만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정말로 참되고 제대로 된 인간을 만들어내는 교육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