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고향 개성을 떠나 서울살이를 한 나의 기억 속 많은 부분은 떡가루 냄새와 뜨끈한 불에 고아지는 엿 냄새로 채워져 있다. 솜씨와 맵시 좋은 맏며느리인 어머니 덕분일까? 유년시절 어머니의 다른 한 손 노릇을 하며 다양한 고향의 맛을 경험했다. 그때가 늘 그리운 이유로 나의 한식사랑은 시작됐다.
지금이야 많이 변했지만 과거 우리 사회 속에서 주방일은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조리사라고 하면 으레 하대하는 것이 일반이었다. 게다가 한식은 잘 구워진 삼겹살과 쌈에 된장찌개를 곁들이는 정도가 대표한식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나는 한식과 조리사에 대한 이러한 현실을 돌아보며 내가 좀 더 이 사회에 보답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1998년 한국전통음식연구소를 설립했다.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한식의 모든 분야를 교육하기 위해서였다.
문턱이 닳도록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 된 2003년의 어느 날 일본 오사카 식품박람회에 참가해 한국의 맛과 멋을 널리 알리라는 국가의 명을 받게 됐다. 일주일간의 일본행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잊을 수 없는 계기가 됐다. 또 한식사랑을 넘어 온 세상에 한식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갖게 됐다. 우리보다 경제가 앞선 일본인들은 음식에 기준과 맛이 매우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또한 강의실에서 강의만 하던 내게 태어나 처음 보는 거대한 식품전시관은 이래저래 나를 주눅 들게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우리의 대표음식인 김치와 비빔밥 그리고 떡을 제대로 각인시킬 한국 대표선수라는 생각으로 그들 앞에 당당히 섰다. 많은 일본인이 오가는 한국홍보관에서 김치를 알리기 위해 김치샘플과 김치꼬마밥을 들고 “칸코쿠 김치 데스. 오이시 데스(한국의 김치입니다. 맛있어요~!!)”라고 외쳤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첫소리는 떨리고 자신 없었지만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은 마음에 목이 터져라 한국의 김치를 외쳤다. 나의 노력에 일본인들도 눈길을 한국홍보관으로 돌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한국관 앞의 인파는 연일 넘쳤다. 비빔밥 시식회와 상온에서 6개월간 둬도 변하지 않는 레토르트떡 시식회를 하며 많은 일본인들의 참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5일간 북적대는 인파와 열정의 외침 속에서 전파된 한국음식에 대한 소문은 일본 기업들과의 비즈니스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미약한 시작인 오사카의 첫 해외사업은 내게 세계 속의 한식을 기대하게 했다. 까다롭다는 일본인이 반했다면 그 다음은 대륙을 향해야 한다는 열망이 간절했다. 매년 근방의 나라를 다니며 한식 알리기에 힘쓰던 중 2007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음식의 밤’을 주관하기까지 이르렀다. 반기문 총장님의 환대 속에 15일간 다양한 궁중음식을 미국 중산층에게 선보였다. 우아한 한복 대신 조리복을 입고 뜨거운 주방에서 음식에 마음을 담아내며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예약자가 늘어가는 것을 보며 행사 성공에 환호했다. 세계에 한식이 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렇게 한식을 세계에 알리는 행보를 한 지 10년이 됐다. 어떤 이는 “윤 소장님 연세가 있으시니 그만 쉬시지요.” 한다. “쉬기에는 아직 젊은 걸요.” 하고 미소로 응수한다. 만일 내가 가지 못한다면 이제는 그들이 찾아오게 해야 할 것이다. 세계 조리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한국음식을 익혀 돌아가게 하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다. 한식에 담긴 과학과 철학, 문학을 담아낼 수 있는 후학도 더 많이 길러야 할 것이다. 걸어온 길에 흡족해 하지 않는 나의 꿈은 오늘도 진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