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날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진탕 술을 마신 뒤 젊은 여자 승무원과 뜨거운 밤을 보내고 일어난 아침. 머리는 지끈지끈, 속은 울렁울렁. 술 깨려고 코카인까지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출근했죠. 동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습관처럼 비행기에 오른 남자. 조종간을 잡을 때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만끽하는 순간입니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하늘이었습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흐린 날이긴 했지만 일단 비구름을 뚫고 솟구쳐 오르기만 하면 그 너머엔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테랑 조종사만 가질 수 있는 여유라고 해두죠. 모든 게 뻔하고 익숙해서 조금 따분하기까지 한 비행. 부조종사에게 잠시 조종을 맡기고 승무원 몰래 미니 보드카 2병을 꺼내 주스에 타 마신 뒤 잠을 청합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지구인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만끽하면서.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의 여느 때와 별로 다를 게 없는 하늘. 하지만 여느 때와는 확실히 다른 비행이었습니다. 덜컹, 쿵. 갑작스런 진동과 소리에 놀라 잠이 깬 남자는 본능적으로 알아채죠. 추락하고 있구나.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구나.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꽉 조종간을 움켜쥡니다. 필사적으로 비행기를 통제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속절없이 구름 아래로, 대책없이 땅으로, 빠르게 곤두박질치는 비행기. 이때 남자가 기지를 발휘해 기체를 거꾸로 뒤집어버립니다. 베테랑 조종사만 보여줄 수 있는 필살기라고 해두죠. 덕분에 잠시 시간을 벌었습니다. 평행을 유지하고 충격을 줄인 뒤 한 번 더 기체를 뒤집어 비상 착륙을 시도합니다. 가까스로 인구밀집지역을 피해 허허벌판에 쿵. 그대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병원 침대에서 깨어나 처음 본 뉴스는 자막으로 이렇게 알리고 있었습니다. “승무원 포함 총 탑승객 102명. 사망 6명. 생존 96명.”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낸 조종사!’ 남자에게 쏟아지는 찬사입니다. 탑승객 전원이 사망할 뻔한 극한의 위급상황에서 무려 95퍼센트의 승객을 살려냈으니 그럴 만도 하네요. 고장난 비행기를 뒤집어 평행을 유지하는 비행은 그가 아니면 절대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고, 인구밀집지역을 피해 비상착륙 장소를 정하는 빠른 판단 역시 그가 아니면 쉽게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휘태커’라는 이 남자의 이름이 모든 언론에 오르내리는 게 당연합니다. 하루아침에 온 국민의 영웅이 되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할리우드 영웅이야기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영화 <플라이트>는 ‘흔히 볼 수 있는 할리우드 영웅이야기’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풀어갑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낸 조종사’의 이름이 언론에만 오르내리는 게 아니라 항공사의 내부 감사 보고서에도 등장하면서부터죠. 이 남자, 실은 영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겁니다. 96명을 구한 베테랑 조종사가 아니라 6명을 죽게 만든 알콜중독 조종사가 아니냐는 겁니다. 하늘에서 보여준 기적의 비행(飛行)을 추켜세우는 대신 땅에서 저지른 비행(非行)을 들춰내는 게 누군가에겐 더 이득이 되는 현실. 영웅이 궁지에 몰립니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살아나온 뒤부터 이 남자의 진짜 추락이 시작됩니다.
자, 영화는 우리에게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공이 큽니까, 일단 술을 마시고 조종간을 잡은 과가 더 큽니까. 도덕적으로 완벽한 조종사와 기술적으로 완벽한 조종사 사이에서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합니까. 정말 작은 거짓말 하나면 모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때, 그 거짓말을 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당신이 휘태커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또 어떤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이 사람은 무죄입니까, 유죄입니까. 휘태커는 영웅입니까, 아닙니까.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들’을 연료탱크에 가득 채우고 138분 동안 힘차게 날아가는 영화 <플라이트>는 한동안 3D 영화 제작에 몰두해 있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오랜만에 만든 2D 영화입니다. 이미지는 2D일지 몰라도 이야기는 충분히 3D로 구현되고 있습니다. 첫 장면부터 ‘배우 덴젤 워싱턴’이 아니라 ‘조종사 휘태커’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멋진 연기 덕분에 캐릭터의 입체감도 훌륭합니다. 과연 <포레스트 검프>와 <캐스트 어웨이>의 감독다운 연출, 역시 <트레이닝 데이>와 <맨 온 파이어>의 배우다운 연기입니다.
<플라이트>에 탑승한 관객은 인생의 난기류에 휩싸인 주인공과 함께 덜컹덜컹, 똑같이 흔들리고 휘청이게 될 겁니다. 추락하는 비행기를 조종할 땐 베테랑이지만 추락하는 인생을 컨트롤 할 땐 별 수 없이 초짜일 수밖에 없는 한 남자를 보게 될 겁니다. 잘못을 인정할 것인가, 잘못을 떠넘길 것인가. 진실을 밝힐 것인가,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휘태커. 그게 어쩌면 나일 수도, 아니면 당신일 수도 있는. 지금 뒤집힌 채 날고 있는 것이 어쩌면 나의 인생일 수도, 아니면 당신의 양심일 수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