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닐 영이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20대 때에는 나와 내 세계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고, 세상만사가 내 일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59살이 되고 보니) 이제야 내가 강물에 떠가는 한 점 이파리라는 것을 알겠다.”
지금 ‘비첨하우스’에 모여 사는 어르신들 생각이 아마 닐 영의 생각과 같을 겁니다. 한때는 정말 세상만사가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때가 있었거든요. 누구는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로, 또 누구는 매일 밤 기립 박수 받으며 무대에 서는 오페라 가수로 참 바쁘게 살던 왕년의 스타들. ‘이제야 내가 강물에 떠가는 한 점 이파리라는 것을 알’ 만한 나이가 된 후 하나 둘 비첨하우스로 모여들죠. 그러니까 이곳은, 은퇴한 음악가들을 위한 아주 특별한 양로원이자 요양원입니다. 특히 죽이 잘 맞는 비첨하우스의 삼총사. 언제나 점잖고 젠틀한 멋쟁이 테너 레지날드, 언제나 점잖지 아니하고 젠틀한 적도 없는 까불이 베이스 윌프, 그리고 이 두 남자와 평생 친구로 지내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수다쟁이 알토 씨씨의 이야기로 영화는 시작됩니다.
세 사람이 모여 앉으면 으레 예전의 좋은 기억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출연한 이야기를 할 때가 제일 즐겁습니다. <리골레토> 3막에 나오는 유명한 콰르텟(Quartet, 4중창)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가씨여(Bella figlia dell’amore)’를 부른 가수들은 많지만, 세 사람은 자신들의 버전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치매 초기 증상 때문에 늘 뭔가를 자꾸 잊어 먹는 씨씨에게도, 그 콰르텟의 하모니만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인생 최고의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 방금 분명히 ‘4중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과 함께 무대에 선 가수가 한 명 더 있다는 얘기죠. 바로 그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 진입니다. 한때는 최고의 소프라노. 하지만 지금은 한물간 레전드. 결국 그녀도 별 수 없이 이곳 비첨하우스에 오게 됩니다. 그렇게 왕년의 콰르텟, 전설의 4인방이 참 오랜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볼 때마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이든 자신의 오늘과 마주치는 게 끔찍해서, 나이 드는 것은 곧 추해지는 과정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울해서, 그래서 더 찡그리고 그래서 더 예민해지고 그래서 더 외로워진 주인공 진. 다시 무대에 서보자는 친구들의 제의에 콧방귀를 뀝니다. 옛날처럼 다시 4중창을 불러보고 싶다는 친구들의 소망을 모른 체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무대 위의 그 짜릿한 행복을 맛보고 싶은 자기 내면의 욕망까지도 애써 외면합니다. 그렇게 내내 불협화음만 내던 ‘콰르텟’이 기어이 멋진 화음이 되어 메아리치기까지. 작지만 단단하게 여물어가는 이 영화엔 제법 괜찮은 라스트 신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연 배우들은 실제로 연극 무대와 스크린을 주름잡던 왕년의 명배우들입니다. 조연 배우들은 실제로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단원으로 활동했던 왕년의 음악가들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 모두 영화 속 배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생을 연기하는 것만 같습니다. 영화가 다 끝나고 시작되는 엔드크레딧. 배우 한 명 한 명의 청년 시절 흑백사진과 현재 모습이 나란히 스크린에 새겨지죠. 늙었으되 결코 낡지 않은 노년의 표상이 관객들 가슴속에 새겨지는 순간입니다.
“시도가 실패한다고 해도 무슨 상관인가? 모든 인생은 결국에는 실패한다. 우리가 할 일은 시도하는 과정에서 즐기는 것이다.” 66세에 세계일주 항해를 마친 모험가 프랜시스 치체스터의 말입니다. 75세에 감독으로 데뷔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이 자신의 첫 번째(이면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연출작 <콰르텟>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도 결국 치체스터의 이야기와 같은 게 아닐까요. ‘죽음을 이길 수는 없으므로, 신과 싸워 이길 수는 없으므로, 모든 인생은 결국 실패한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죽는 날까지 먼저 죽지 않는 것이다. 시도하라. 실패할지라도.’
끝으로 감독이 직접 쓴 연출의 변을 첨부합니다. 그가 쓴 이 글을 보니 알겠습니다. 그가 만든 영화 <콰르텟>을 보고 나니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더스틴 호프먼은 좋은 배우이고 좋은 감독이고 무엇보다 참 좋은 어른이라는 것을.
“누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고 했죠. 하지만 저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난 거의 75세이고,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다음 세 가지 중 하나가 되죠. 인간으로서 성장하거나 혹은 퇴행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그대로 머물거나. 저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것은 퇴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성장하는 것은 반드시 가능합니다. 제가 이 영화를 연출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 작품에 담긴 삶에 대한 관대한 시선과 나이듦에 대한 낙관적인 자세 때문입니다. 이 영화엔 인생을 관조하는 유머와 예술가들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씩씩하게 늙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