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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나의 터닝포인트, 안나푸르나
엄홍길 산악인 2013년 04월호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삶은 산과 함께였다. 나는 1960년 경남 고성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 살 때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망월사계곡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의 놀이터는 산이었다. 1977년 고상돈 선배님이 에베레스트에 올라 산소마스크를 쓰고 커다란 무전기를 들고 있는 기사를 보고, 그때부터 ‘아! 에베레스트에 올라야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설악산 희운각대피소에서 2년 동안 물건을 등에 지고 날라주며 설악산 골짜기를 마음껏 누볐다. 그러다 특수부대인 해군 수중폭파대(UDT)에 입대했다. 산행으로 다져진 몸에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UDT의 훈련이 더해져 정신력과 육체적인 능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1985년 나의 오랜 꿈이었던 히말라야 등반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에베레스트 하나가 목표였다. 하지만 고봉을 하나씩 오르는 사이 8천미터 14좌(座)도 해볼 수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자 16좌로 꿈을 더 키웠다.


하지만 성공의 달콤함보다 동료와 후배, 가족 같던 셰르파를 잃은 슬픔 등 나의 산에는 한(恨)도 많다. 안나푸르나(8,091m)는 특히 그렇다. 1997년 세 번째 도전에서 혈육 같은 셰르파 나티가 크레바스에 빠져 목숨을 잃었고, 1998년에는 마지막 캠프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설사면(눈 쌓인 지역)에서 다리가 완전히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거기서 살아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지 의사들이 ‘수습불가’ 판정을 내릴 정도로 상태는 심각했다. 귀국 직후 찾아간 병원에서도 ‘이젠 산에 못 간다.’는 사형선고 같은 말을 들었다. 집에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데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도봉산 원도봉이 내게 “그렇게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하냐, 빨리 깁스를 잘라내고 나에게 와야지.”라며 말을 걸어왔다.


상처가 낫고 깁스를 풀자마자 이를 악물고 재활과 물리치료를 하며 다시 원도봉산에 오르며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백운대 정상까지 갔을 때는 산을 다시 오를 수 있다는 희열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10개월 만에 다섯 번째로 안나푸르나에 도전할 수 있었다. 다섯 번 만에 밟은 안나푸르나의 정상은 희열과 감격보다는 서러움이 더 가득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그래도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받아주셔서 감사하고 고맙다.’고 산에게 인사했다. 안나푸르나에서의 많은 실패는 내게 독이 아닌 약이 됐다. 그 후로 더 험난한 산에 도전할 때 좌절했던 경험이 없었다면 16좌라는 기록을 달성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산을 오르는 대장 엄홍길이 아닌, 인간 엄홍길의 삶을 살고 있다. 20여년간 히말라야 16좌에 도전하려고 보낸 긴 시간, 산이 나를 받아줬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곳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내가 셰르파가 돼줘야겠다고 생각한다. 2008년 5월 엄홍길휴먼재단은 나와 등반하다 사고를 당한 셰르파와 후배 대원들의 유족을 돕기 위해 설립됐다. 재단은 네팔 등지의 오지 마을 아이들에게 물질적 지원보다는 가난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교육을 지원한다. 바로 학교의 설립이다. 지금까지 총 4개의 학교를 세웠고, 올해는 3개의 학교를 동시에 착공할 예정이다.


나는 지금도 안나푸르나와 K2, 캉첸중가, 로체샤르 등 16좌에 함께 오른 모든 동료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함께 등반해준 이들, 자신을 희생한 모든 이들을 위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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