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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컨텐츠황금의 나라 신라의 상징, 황남대총금관
한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13년 04월호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성씨는 김(金)이다. 김씨 성은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 등과 비교해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한국 고대국가 형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김씨 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바로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다. 이 두 김씨는 같은 한자와 발음을 갖고 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른 원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해 김씨는 쇠, 즉 철(鐵, Iron)을 상징하며 경주 김씨는 금(金, Gold)에서 그 성씨의 연원을 추정할 수 있다. 쇠와 금 이 두 금속은 고대사에서 너무나 중요하고 상징적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결국 왕족의 성으로까지 사용된 것이다.


황남대총, 마립간 시대의 가장 큰 왕릉


특히 황금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애용된 금속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무덤에서 나온 금관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에서 우월한 통치자가 나타나고 고대국가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때는 4세기 중반 마립간(麻立干)의 등장부터다. 이 시기의 무덤들은 현재 경주시내에 널리 분포돼 있는데 고구려, 백제의 무덤과 달리 도굴이 불가능한 구조로 만들어져 부장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땅 위로 드러난 거대한 봉토를 지닌 이 무덤은 천년왕국 신라를 상징하는 경관으로 경주의 상징이 되고 있다. 왕의 권위를 거대한 무덤과 호화로운 부장품으로 나타내는 시대는 삼국이 불교를 국가이데올로기로 채택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황남대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됐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가장 큰 것에 속하며, 귀금속 장신구와 희귀한 수입품, 엄청난 양의 철제품과 질그릇이 부장된 점에서 학자들은 이 무덤을 왕릉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왕의 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1976년 발굴이 끝난 이후 황남동 98호 무덤으로 불리다가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란 뜻으로 ‘황남대총’이라 이름을 얻게 됐다.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두 개의 무덤을 잇댄 쌍무덤인데, 먼저 만든 남쪽 무덤은 왕의 능이었고, 북쪽 무덤은 나중에 잇대어 만든 왕비의 능이었음이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특이한 점은 황남대총 북분에 안장된 왕비가 금관과 금으로 꾸민 허리띠 이외에도 금팔찌, 금반지, 금목걸이, 가슴꾸미개 등으로 치장해 왕보다 오히려 훨씬 더 화려한 모습으로 묻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여왕을 배출한 왕조인 신라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상징하는 예이기도 하다.


신라 여성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하는 황남대총 금관


국보 제191호로 지정된 이 왕비의 금관은 27.3cm의 높이를 가지고 있다. 이 금관은 신라에서 유행한 나뭇가지 모양 금관의 전형을 보여준다. 세 개의 나무 모양 맞가지와 두 개의 사슴뿔 모양의 엇가지로 조합된 5개의 세움장식이 좁고 긴 머리띠에 높이 솟아오르도록 부착됐다. 표면에는 무늬를 새기고 곱은옥과 달개를 촘촘히 매달아 더욱 화려하게 보이도록 했다. 머리띠는 유기질로 된 끈으로 양끝을 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굵은 고리의 귀걸이와 금제드리개는 착용한 사람이 여성이었을 수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대체로 남성의 귀걸이와 드리개는 가는 고리인 경우가 많아서 지금의 우리들이 신라시대 귀족들을 만난다면 훨씬 화려하게 꾸민 모습의 여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화려함은 단순히 장식적인 의미를 넘어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때문에 신라 여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신라라는 고대왕조에서 주역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황남대총에서 가장 의아한 수수께끼는 왕과 왕비가 지녔던 관의 재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왕은 금동관을 지녔고 왕비는 금관을 지니고 있었다. 금동관과 금관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큰 부장품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신라에서 특별한 지위를 누린 여성의 권력이 매우 컷다는 것을 엄연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신라금관의 장식들은 상징적으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의 형식은 북방 초원지역 유목민들이 남긴 유물에서 많이 등장한다. 신라금관의 형식은 황남대총에서 완성된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해서 점차 변해가는데 전체적으로 점점 가지의 수가 늘어나고 장식이 덧붙여져 화려함을 더해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마지막 단계가 되면 더 이상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관이 나타나지 않고 구리판에 도금한 금동관만 만들어졌다. 이런 현상은 관에 내포된 정치적 권위가 사라져 버렸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변화의 추이는 ‘나뭇가지 모양 관’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왕과 왕족은 한때 제사장이었으며, 마립간 시기까지 꾸준히 국가의 제의를 주관했다.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 모양 관’은 신성한 나무를 상징하는데, 이는 통치자이자 국가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신라의 마립간과 그 일족의 성격에 부합하는 상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마립간 시기 이후 신라의 법흥왕은 전통제의를 대신해 불교를 공인했고 더불어 국왕의 세속적 권위를 월등히 강화시켰다. 이로써 신라의 왕에게는 전통제의와 관련된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 모양 관’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황남대총금관은 국립중앙박물관 1층 선사고대관의 독립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으며 다른 금관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함께 출토된 황금유물과 전시되고 있다. 벚꽃이 가득한 4월, 가족과 함께 천년고도 경주여행을 계획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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