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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박정석의 길 위의 순간들아를의 남자 고흐 그리고 아를의 여인
박정석 여행작가 2013년 10월호

 

남프랑스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아를(Arles)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로 유명해진 작은 도시. 


그 남자는 빈센트 반 고흐다. 도시 곳곳에 커다란 원형경기장 등 로마인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네덜란드 태생의 이 불세출의 화가를 빼놓고는 아를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이곳에서 그는 20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 등 많은 명작들이 모두 이 시기에 그려졌다. 춥고 우울한 파리를 떠나 기후가 좋은 프로방스에 온 고흐는 유일한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1890년 고흐는 거듭되는 우울증과 예술적 좌절감에 시달리다가 37세의 나이에 권총자살을 시도, 이틀 뒤 동생이 지켜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그린 1,500점의 그림 중에서 생전에 팔린 그림은 단 한 점뿐이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꼽히는 고흐의 작품들을 만일 모두 판매한다면 현재 가격으로 약 1,500억달러,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150조원이 훨씬 넘는다. 세계 3대 부자에 등극할 수 있는 재산. 이 사실을 무덤 속의 고흐가 안다면 기뻐할까, 아니면?? 


 

고흐는 아를을 유명하게 만든 여자, 바로 <아를의 여인> 연작을 남겼다. 카페 주인인 지누씨의 부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녀는 손님이 한산한 시간에 고흐를 위해 모델 노릇을 자처했다고.


두 번째 아를의 여인은 그림이 아니라 음악 속에 있다. 알퐁스 도데의 동명 희곡에 조르주 비제(Georges Bizet)가 곡을 붙인 <아를의 여인>. 연극도 음악도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자신의 작품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비제는 곧장 27곡에 달하는 원곡에서 일부를 추려내 편집하여 네 곡으로 이뤄진 모음곡으로 개작, 큰 성공을 거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를 인근의 남프랑스 농가에 사는 청년이 아를의 투우장에서 한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지나 보수적인 집안 어른들은 여인의 과거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둘의 결합에 반대한다. 청년은 결국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순진한 처녀와 약혼하지만 결혼식 전날 밤에 열린 축하파티에서 아를의 여인이 춤추는 장면을 목격하고 일깨워진 고뇌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2층 창문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는 비극적인 결말이다. 


세 번째 아를의 여인은 내가 직접 만났다. 도데의 희곡에 등장하는 팜므파탈이 20년쯤 나이 먹은 듯한 외모의 여인이었다. 꾸밈없는 차림새지만 섬세한 이목구비에 프랑스적인 우아함을 간직한 마리 폴냑. 라 바가본드(La Vagabonde), 즉 방랑자라는 이름을 가진 비앤비의 주인이다. 방 두 개짜리 숙소지만 빳빳하게 다린 시트며 새하얀 욕실 수건이며, 디테일이 완벽하다. 새로 개봉한 초록색 비누에는 ‘프로방스’라고 선명하게 찍혀 있고 말린 라벤더를 묶어 만든 방향제에 텔레비전은 없지만 구식 라디오를 갖췄다. 소박한 이 공간을 얼마나 쓸고 닦고 정돈하고 보완했는지 동분서주하는 마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아침은 몇시에 줄까?”
“부인 마음대로 하세요. 아무 때나 좋아요.”
“아냐. 아무 때나 원하는 시간에 줄 테니 시간만 대.”
“그래요? 그럼, 한 여덟시쯤 어떨까요?”
순간 아줌마 얼굴이 흐려진다. 아, 남프랑스의 여유로움이여!
“아이구, 너무 이르군요! 그럼 아홉시에 먹을게요. 열시도 괜찮아요!”
“아냐 아냐, 여덟시 좋아. 여덟시에 줄게! 여덟시!”


서로 주거니 받거니 양보를 거듭하다가 아줌마 뜻대로, 그리고 우리의 최초의 뜻대로 여덟시에 아침을 먹기로 했다. 시차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이미 눈이 떠졌는데, 여섯시 반이 되니 희미한 알람 소리가 열린 창문을 통해 아래층에서 들려온다. 미안하다. 여덟시나 아홉시나 열시나 여행자에게는 사실 별 상관없는 일인데.

 

 

단출하지만 너무나 정갈한 아침상이 좁은 뒷마당에 이미 완벽하게 차려져 있다. 입술에는 빨간 루즈를 바르고, 희어지기 시작한 곱슬머리 금발을 하나로 질끈 묶고, 허리에는 단정하게 하얀 에이프런을 두른 마리가 엄숙한 얼굴로 부엌과 뜰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아를은 과거에 묶인 채 현재를 살아가는 마을이다. 거리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흔적이 가득하고 무너질 듯 낡은 건물은 버려진 채 잊혀져버린 곳의 느낌이 역력하다. 이민자들이 급증해서 밤에는 치안이 좋지 않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방랑자’의 대문 앞에서 작별인사를 고한 후 잠시 걸어다가 뒤돌아보니 마리는 그때까지 대문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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