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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무세이온 (Mouseion)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념하는가? - 노근리 평화기념관
최우용 건축가 2014년 08월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 닷새 동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일대는 광기로 벌겋게 물들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 미군이 ‘피난시켜 주겠다.’며 인근주민 500여명을 노근리 경부선 철로 일대에 모아놓고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이유도 모른 채 불시에 불난리를 당한 마을 사람들은 철교 밑 굴다리(쌍굴)로 숨어들었고, 미군은 굴다리 앞 야산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굴다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조준 사격했다. 백수십명 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불구가 됐고 행방불명돼 사라졌다. 그리고 사건은 ‘반공’과 ‘친미’ 뒤에서 잊혔다.


그러나 노근리 쌍굴 속, 그 무간지옥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그 끔찍했던 고통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제발 그 말도 안 되는 고통을 알아달라고 울고 또 울었지만 반공이 국시며 친미가 생존전략인 종전 후의 남한 사회에서 그들의 울음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과 집단의 야수성이 마을 촌부들에게 가한 폭력은 가혹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그들은 반세기 동안 울었고 반세기 동안 시름했다. 그 반세기의 울음과 시름 끝에, 2009년 노근리 옛 노송초 일원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착공됐고 같은 해 건축가 이종호가 설계한 ‘노근리 평화기념관’이 2011년에 완공됐다.


이 나라에 세워진 대부분의 전쟁 관련 기념관 또는 시설물들은 엄정한 형태로 비장하다. 높은 기단, 엄격한 좌우대칭, 육중한 석재마감, 압도적인 스케일 등은 정태적이며 위압적이다. 이 정태와 위압 속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되고 가해자의 모든 행위는 악으로 규정되며, 종국적으로 반공은 성역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용산 전쟁기념관, 인천 상륙작전기념관, 백마고지 전적기념관 등은 그 형태와 동선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일방향적 훈육을 도모한다.


건축가 이종호는 이 일방향적 훈육의 반대지점에서 노근리 평화기념관을 구상했다. 피해 규모와 가해원인조차 명확히 규명되지 못하고 있는 노근리 사건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건축가는 비애에 젖은 위로와 악에 받친 추궁을 뒤로하고 피해자가 겪은 고통을 환기시키는 데 집중했다.


관람객들은 수면 아래, 저 깊은 곳에 있는 지하 1층 기념관 입구로 접근하게 된다. 작은 규모의 지하 전시관은 노근리 사건의 사실들만을 추려내 보여준다. 노근리 사건의 경과를 확인한 관람객들은 길고 협소한 통로를 지나게 되는데, 이는 쌍굴 속 닷새 동안의 공포를 복원하려는 것이리라. 통로 끝에 이르면 벼락 치듯 탁트인 높은 공간이 나타나고 1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유도된다. 1층 전시실은 잊혔던 사건을 복원시키려는 이들의 눈물겨운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이제 2층으로 오른다. 좁고 깊은 상승의 공간을 거치면 기념관 외부로 툭 튀어나와 있는 유리박스 안에 서게 된다. 여기 ‘추모의 방’에서 관람객들은 유리 너머 무수한 총알이 박힌 쌍굴과 대면하게 된다. 이제 관람은 끝이 난다. 출구로 나오면 삼각형으로 찢겨진 녹슨 철판의 파편들을 옆에 두고 걷게 된다. 철판에 뚫린 구멍은 쌍굴에 박힌 총알의 은유런가?


‘고통의 벽’을 지난 관람객들은 쌍굴로 인도된다. 건축가 이종호는 강요되는 기억과 선악 구분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는 무수한 개인들이 겪었던 처참한 고통의 기억이 사상과 이념 또는 정치적 윤색 속에서 방기되는 것을 경계하며 노근리 평화기념관을 설계했다. 기념관은 총알 박힌 쌍굴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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