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를 주지 않는 부채 증서는 휴지조각이다. 마찬가지로 배당금을 지급하지 않는 주식은 가치 없는 종이에 불과하다. 기업은 배당을 지급하고, 주주는 받은 배당금을 소비와 유망기업 재투자에 활용하는 것이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이기도 하다. 과거 우리 경제는 마치 이 원리를 잊은 듯이 살아왔다. 어째서인가? 기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몸집과 체력이 빠르게 성장하는 청소년기를 거친다. 청소년기 기업은 이익을 배당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재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 당장의 배당금을 포기하고 기업을 키우면 미래에 돌아올 배당금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우리나라 기업의 배당수익률이 선진국에 비해 낮았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미래를 기약하며 배당금 지급을 미루는 기업 경영진의 결정은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되곤 했다.
이제 우리 경제가 성숙기에 도달해 저성장 시대에 진입했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경제가 청소년기가 아니므로, 성숙단계에 도달한 기업도 다수다. 이들 기업은 막연히 미래로 배당금 지급을 미루는 행태가 과연 주주는 물론 경제의 이익에 기여하는 길인지 심각하게 자문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 관점에서 두 미국 기업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애플(Apple)’의 이야기다. 두 기업은 얼마 전까지 배당을 지급하지 않는 무배당 기업이었다. 이익을 자체 재투자에 사용하며 성장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두 회사의 배당정책이 최근 반전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03년 배당지급을 개시한 뒤 지난 10년간 매년 이익의 26%를 주주에게 돌려주고 있다. 애플은 2012년 본격적으로 배당지급을 시작해 2013년 이익의 29%를 주주에게 지급했다. 두 기업은 무엇보다도 인류의 삶에 기여한 기술혁신으로 역사에 남겠지만, 기업이 성장주기에 따라 어떤 경로를 밟으며 주주와 국민경제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준 배당정책의 모범 사례로도 재무교과서에 남을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 경제에는 비슷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기업의 적극적 배당을 끌어낼 제도환경이 마련돼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배당이 주주의 법적 권리이지만, 선진국에서도 주주의 적극적인 요구가 없는데 기업이 자발적으로 배당을 지급하는 예는 많지 않다. 이때 배당지급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주주는 기관투자자, 특히 그중에서도 연기금이다. 가입자에게 연금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 연기금으로서는 성숙기업이 지급하는 안정적인 배당이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고령화로 급속히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민연금도 현재 87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규제로 인해 배당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배당 요구를 공공 부문의 경영개입으로 매도하며 아예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하기도 한다. 국민의 푼돈을 모아 막대한 기금으로 쌓아놓고, 막상 제대로 된 운용은 하지 말라는 어이없는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다. 이 문제의 해결에서부터 정책대응은 시작돼야 한다.
새 경제팀의 경제정책방향은 이 점을 제대로 짚고 있다. 연기금의 배당 관련 주주권 행사제약요인을 해소하겠다는 방침이 신속히 집행되기를 기대한다. 일부 논자들은 배당촉진정책이 가계의 가처분 소득과 소비여력 증대로 연결될 것인지 의문시한다. 실상은 외국인 주주에게 이익이 되는 정책이라는 국수주의적 비판도 있다. 기업배당을 통한 자금의 선순환 유도는 경기대응을 넘어서, 시장경제의 기본질서를 구축하는 정책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다 적절한 관전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