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이루지 못한 꿈 하나씩은 있습니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젠 그 꿈을 포기해버린 사람,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그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죠. 존(돔 놀 글리슨 분)은 후자입니다. 뮤지션으로 성공해 무대에 서고 싶은 꿈을 아직 포기하지 못했어요. 오늘도 퇴근길에 새로운 멜로디를 지어내 흥얼거립니다. 드디어 근사한 노래를 작곡한 것만 같아 잔뜩 들떠 있는 존. 하지만 집에 와 막상 키보드 두드리며 곡을 완성하려다 금세 맥이 풀리고 말죠.
“빌어먹을! 마음에 안 들어. 무슨 놈의 노래가 이래.”
다음 날, 바닷가를 걷다가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봅니다. 구급대원이 간신히 끌어내죠. 존과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또 다른 남자가 투덜댑니다. 키보드 연주자가 물에 빠져죽겠다고 저 난리를 치는데 오늘 공연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존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립니다.
“나도 키보드 칠 줄 아는데….”
그날 밤, 키보드 연주자로 무대에 서 있는 존. 아까 바닷가에서 나란히 서 있던 남자가 알고 보니 한 인디밴드의 매니저였어요. 급한 마음에 일단 존이라도 데려가 무대에 올린 겁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 ‘이루지 못한 꿈’이 이렇게 이루어지기도 하는군요.
소론프로프브스(The Soronprfbs). 이름도 외우기 어렵지만 그들이 하는 음악은 더 이해하기 어려운 밴드. 아는 사람만 아는 밴드인데 그 아는 사람의 수가 워낙 적어서 사실상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밴드. 그래도 존은 마냥 좋았습니다. 비록 소극장이긴 해도 진짜 무대에 서 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습니다. 하루아침에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건 따로 있죠. 언제나 커다란 탈을 뒤집어쓰고 무대에 오르는 밴드의 리더 프랭크(마이클 패스벤더 분). 무대에서 내려온 뒤에도 절대 그 탈을 벗지 않는 보컬 프랭크. 탈을 쓴 채로 밥 먹고 똥 싸고 샤워하고 잠도 자는 천재 뮤지션 프랭크. 하루 24시간 큰 머리 인형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프랭크보다 더 신기한 건 없습니다.
존은 다짐합니다. 이 신기한 뮤지션 프랭크의 천재성을 널리 알리고야 말겠다고. 그래서 트위터와 유튜브로 열심히 밴드를 알리기 시작해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무명 밴드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덕분에 아주 큰 페스티벌에 초대됩니다. 존의 바람대로 프랭크가 유명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런데…. 이제와 문득 존은 궁금해집니다. 과연 프랭크 본인도 유명해지는 걸 원할까? 자신의 진짜 얼굴을 내보이고 싶어 할까? 애초에 그런 탈을 뒤집어쓴 이유는 대체 뭘까?
영화 <프랭크>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영화입니다. 새로운 <엑스맨> 시리즈와 <노예 12년>, <프로메테우스> 같은 영화로 한창 주목받고 있는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가 영화 내내 그 잘생긴 얼굴을 감추고 출연하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럽죠. “너무 웃겨서 소리 내어 웃으며 시나리오를 읽었다.”고 패스벤더가 고백할 만큼 즐겁고 유쾌한 해프닝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낄낄대며 영화를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극장을 나설 때는 그만 마음이 짠해지고 마는 겁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던 프랭크의 탈이 언젠가부터 안쓰러워 보이는 겁니다. 그가 탈을 쓰게 된 이유, 그가 탈을 벗지 못하는 이유까지 알고 나니 더 이상 키득댈 수가 없는 겁니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이던 프랭크가 알면 알수록 나와 너무 닮은 인간이란 걸 눈치채게 되는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는 오래 전 신문에서 읽은 칼럼을 떠올렸습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심리학자 아니타 존스턴의 책 「달빛 아래서의 만찬」을 소개하며 칼럼에 인용한 이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폭우 후 물살이 사납게 불어난 강물에 빠졌다. 다행히 통나무가 떠내려 와서 붙잡고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며 목숨을 부지한다.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자 헤엄치려 하는데, 한쪽 팔을 뻗는 동안 다른 쪽 팔이 거대한 통나무를 붙잡고 있다. 한때 (나의) 생명을 구한 그 통나무가 이제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가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가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했다고 정희진은 소개합니다. 여기서 중독이란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같은 것이C겠죠. 하지만 정희진은 ‘중독’의 범위를 조금 더 넓게 해석하고 있어요.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중략)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된 관계, 30년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한겨레 토요판> 2013. 12. 14일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중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통나무에 매달려 떠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위협이 되는 것’들이 각자의 인생에 한두가지씩은 있지 않던가요? 세상이 원하는 속도와 방향에 나를 맞추려고 재빨리 매달려 의지한 통나무들. 진짜 나를 감추고 포장하기 위해 잠시 빌려 썼다가 그만 벗을 때를 놓쳐버린 가면들.
프랭크에겐 탈이 바로 가면입니다. 15년된 통나무입니다. ‘강가의 사람들’은 이제 그만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프랭크는 그러지 못해요.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나, 볼품없는 나, 내가 벗어나고 싶던 진짜 나의 모습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는 쉽게 탈을 벗지 못합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던 프랭크의 탈이 언젠가부터 안쓰러워 보이는 이유입니다. 나와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이던 프랭크가 알면 알수록 나와 너무 닮은 인간이란 걸 눈치채는 까닭입니다.
누구에게나 이루지 못한 꿈 하나씩은 있죠. 누구에게나 벗지 못한 가면 하나씩은 있어요. 이젠 그 가면을 벗기로 마음먹은 사람, 아직 그 가면을 벗어던질 용기가 없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죠. 당신은 어느 쪽입니까? 프랭크는 어느 쪽일까요? 이 우스꽝스러운 영화의 참 서글픈 라스트 신은 과연 해피엔딩인 걸까요, 아니면 새드엔딩인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