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장욱진은 그의 중년에 처자식을 남겨두고 경기도 남양주 덕소로 들어가 자신만의 고립된 그림터를 꾸렸으며, 열 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12년간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12년이란 긴 세월에 비해 당시 그가 남긴 그림의 수는 매우 적다.
새벽 산책을 마치고 들어와 빈 화폭을 마주할 때마다 장욱진은 늘 암울했던 듯하다. 이 시기의 그는 빈 화폭을 힘겨워했으며 그림의 실마리를 얻지 못했고 그때마다 술에 취했다고 한다. 덕소 시절의 장욱진은 당대의 화단을 뒤덮고 있던 앵포르멜(기하학적 추상을 거부하고 미술가의 즉흥적 행위와 격정적 표현을 중시한 전후 유럽의 추상미술) 등의 주류 화풍을 실험하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고뇌했다고 유족들은 전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뇌에 찬 물음은 ‘나의 그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동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장욱진 그만의 그림터로 회귀했다.
장욱진은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모방과 재현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구상과 추상의 극단에서 배회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화단에 불어오던 ‘일본 바람, 민족적 민속 바람, 미니멀 바람, 극사실 바람, 추상 표현주의 바람, 민중미술 바람’에 떠밀리지 않고 오직 그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덕소 고립무원의 한 뼘 방바닥에 쭈그려 앉아 그림을 그리면서 노도의 번민을 벗어내고 그만의 그림밭을 일구었다. 그는 그 밭에 천진무구와 고졸(古拙)과 질박(質朴)의 씨를 뿌리며 우리 근현대 화단의 대표작들을 경작해냈다.
얼마 전 경기도 양주시에 시립 장욱진미술관이 개관했다. 건축가 최성희와 로랑 페레이라(Laurent Pereira)가 설계한 미술관은 양주시 장흥관광지 안에 있다. 방향이 반대인 두 개의 꺽쇠기호(^)를 포개놓은 형상의 미술관은 주변을 압도하지 않으며 재기 발랄하게 산자락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을 설계한 두 건축가는 장욱진미술관 설계의 실마리로 ‘정신이 태어나 자라는 근원적 공간, 가장 기본이 되는 공간인 방’을 언급하며, 그 근원적 ‘방’들을 여러 개 만들고 그 방들을 위계 없이 엮어 놓았다. 그 방과 방을 연결하는 사이사이에 장욱진의 그림이 걸려 있으며, 그림과 그림을 연결하는 사이사이의 근원적 방에는 장흥의 풍광을 담아내는 커다란 창이 뚫려 있다. 일영봉과 마봉, 장흥계곡의 풍경 그리고 미술관 내부 중정의 고요한 정취는 미술관 곳곳에 뚫린 커다란 창을 통해 넘쳐 흘러든다.
장욱진미술관의 관람객은 안내와 로비를 거쳐 1층 전시관을 순회하고 2층으로 오르게 되는데, 다시 자연스레 2층을 순환해 전시의 종점에 이르게 된다. 비정형적이고 자유분방한 미술관의 형상과는 다르게 관람객의 동선은 비교적 계획적으로 유도되고 있다.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으나, 중간 중간 경유하는 각 방들에 쏟아지는 초록 풍경의 여유로 숨 가쁘게 내몰리지 않는다. 그림과 풍경이 뒤섞이며 관람과 산책이 뒤섞인다. 미술관은 그림과 풍경 그리고 관람과 산책을 함께 엮어내고 있다.
장욱진의 그림은 구상과 추상 사이에 걸쳐 있다. 그의 그림은 기름으로 그려졌으나 수묵의 농담을 담아내고 있으며, 그의 그림 속에 그려진 집과 방과 공간들은 한 점의 소실점으로 수렴되지 않으며 무한한 공간을 도모한다. 장욱진은 그 천진무구한 화풍으로 고졸과 질박을 추려내 이 땅의 정서와 서정을 화폭으로 옮겨냈다. 그의 그림이 걸린 미술관은 오지랖을 넓히며 그림과 더불어 풍경까지를 챙기고 있는데, 그 수법이 적절해 그림과 풍경, 관람과 산책을 성공적으로 엮어내고 있다.
장욱진과 그의 그림 그리고 그의 그림이 걸린 미술관은 붙박인 주류의 한 곳으로 귀순하지 아니하며 그 자유분방함으로 그림과 미술관을 서로 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