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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열의 미학‘가족’이 함께 만드는 시장
이랑주 비주얼머천다이저(VMD) 2015년 05월호


폴란드 크라쿠프 중앙시장

 

500년 동안 변하지 않고 한 모습을 간직한 시장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폴란드행 기차에 올랐다. 에어컨도 없고 창문도 올라가지 않는 덜컹거리는 낡은 열차는 사우나보다 조금 시원했다. 10시간의 열차 사우나를 마치고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 도착하니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500년의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은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 너무나 궁금해 사람 몰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눈곱만 겨우 뗀 채 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장 입구에 도착한 나는 엄청난 규모의 광장과 아름다운 건축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중앙시장은 유럽에서 제일 큰 시장이다. 베니스의 산마르코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광장은 크라쿠프의 사교장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면적 4만㎡로 주위에는 옛 크라쿠프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이 줄지어 있다.

 

시장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로 처음엔 벽돌로 된 고딕양식이었으나 1555년 화재로 전소된 후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해 르네상스양식으로 다시 지어졌다. 2층은 폴란드 조각과 회화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1층은 폴란드 전통제품과 다양한 기념품을 살 수 있는 잡화점이 들어서 있다.


건물 안에 있는 기념품 가게들도 아름다웠지만 건물 옆 광장에 펼쳐진 노점형태의 광장형 시장은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의 얼굴처럼 생기 넘쳤다. 광장에 즐비한 많은 상점들은 간판이며 점포모양이며, 집기·소도구까지 똑같은 얼굴을 한 매장이 한 곳도 없었다.


오렌지색 천을 깐 나지막한 테이블 위에는 하얀 레이스 꽃들이 춤을 추듯 펼쳐져 있다. 그 옆엔 레이스 색상보다 더 고운 하얀 백발을 한 할머니가 한 땀 한 땀 레이스 꽃을 만들고 있다. 도자기 가게에선 아저씨가 물레를 신나게 돌리며 아이들에게 폴란드 전통도자기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꿀을 파는 작은 노점 입구에는 짚으로 만든 곰 한 마리가 떡하니 앉아 있다. 꿀을 퍼먹고 한숨 자는 모양이다. 집에서 직접 재배한 꿀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파는 이 가게는 100년 넘게 가업을 이어 온다고 했다.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마차 위에는 폴란드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수박보다 더 큰 빵들이 가득 실려 있다. 깔끔하고 예쁜 매대 진열이 아니라 이렇게 보여 주니 빵의 역사와 전통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으로 느낄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빵을 팔고 있는 직원의 유니폼이다. 하얀 앞치마를 입고 등장했다면 그다지 놀라울 것 없었겠지만 낡아빠진 마부복을 입고 빵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진열의 미학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빵 정말 오래되고 전통 있어요.’ 손으로 적고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500년 전부터 사용하던 마차와 마부복만으로 충분히 전달되고 남음이었다.

 

접시를 파는 가게에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소녀 둘이 앉아서 열심히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핏 봤을 때는 시장에 놀러온 고객이 체험 삼아 만드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접시가게 사장님의 딸들이었다. 주말에는 엄마가게에 나와서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판매도 같이한단다. 엄마 또한 할머니에게 배운 것이라고 한다.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딸들의 말에 500년 전통은 건물의 형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임을 알게 됐다.

 

세월을 엮어서 만든 레이스 공예품, 자신이 수놓은 자수블라우스를 입고 정성스럽게 수를 놓는 아주머니, 물레를 직접 돌리며 아이들에게 폴란드 전통 도자기에 관해 설명하는 아저씨, 돋보기보다 더 두꺼운 안경을 쓰고 나무 조각에 몰두하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500년 전 장인들의 숨결이 오늘로 이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물건을 파는 가족 장인들이 포진해 있는 500년 된 크라쿠프 시장을 보면서 우리 전통시장도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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