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5일 화상으로 개최된 제4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에서 RCEP이 최종 서명됐다. 지난 8년간의 길고 긴 협상이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 지난 2년간 RCEP 협상을 담당하면서 15개국 간 협정문 문구 하나, 토씨 하나를 일일이 합의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잘 알기에, 역사적인 순간입니다로 시작한 대통령의 정상회의 말씀이 누구보다 가슴에 와닿았던 순간이었다. 2012년 협상 개시 선언 후 8년 만에 이룬 성과 RCEP은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전 세계 인구, GDP, 무역규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FTA이기 때문에 코로나19 등으로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우리 수출과 경제에 큰 활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발효된 지 13년이나 지난 한아세안 FTA가 대폭 개선됨으로써 아세안과의 교류협력이 한층 강화되고 신남방정책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내에 통일된 무역규범이 마련돼 원산지, 투자, 지식재산권(이하 지재권), 무역구제, 무역기술장벽(TBT) 등에서 우리 기업의 편의도 제고됐다. 여담이지만 RCEP이 세계 최대의 FTA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나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최초의 FTA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RCEP은 첫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우리가 서명한 최초의 FTA이고 둘째, 우리 FTA 사상 최초로 화상회의를 통해 서명을 진행했으며 셋째, 한아세안 및 한EU FTA가 양자 FTA 성격이 큰 점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우리가 체결하는 최초의 다자메가 FTA다. RCEP은 1990년대 말에 시작된 동아시아 경제통합 논의 결과의 일환으로, 아세안 회원국 그리고 아세안과 FTA를 체결한 6개국(한국, 일본, 중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 간 광범위하고 높은 수준의 역내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기 위해 협상이 시작됐다. 2012년 11월 협상 개시 선언, 2013년 5월 첫 협상 시작 이후 모두 31차례의 공식협상, 19차례의 장관회의 등이 개최됐고 비공식 협상 등을 합치면 훨씬 더 많은 회의가 열렸다. 8년이라는 긴 협상 기간이 말해주는 것처럼 협상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최빈개도국부터 선진국까지 다양한 국가가 참여하고 있고,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보니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사안도 예상치 못한 데에서 이견이 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2019년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협상을 주도한 아세안은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여타 참여국들도 적극적이었다. 한 달에 2~3번씩 협상을 하며 조금씩 진전시켜나갔고 결국에는 각국 장관이 전날 밤 12시까지 협의한 끝에 2019년 11월 4일 제3차 정상회의에서 협정문을 우선 타결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2020년에도 각국은 의지에 차 있었고 시장개방협상이 이미 70~80% 완료된 상황이었기에 조금만 더 하면 RCEP 최종 타결 및 서명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코로나19가 복병이었다. 대면회의가 불가능하다 보니 협상 진전은 더뎠고, 협상이 타결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확산됐다. 하지만 참여국들은 하루 8~9시간씩 화상회의를 하며 협상을 진전시켰고, 결국 RCEP 최종 서명에 이르게 됐다. RCEP 서명 후 한 달이 훨씬 넘은 지금, 그간 많은 언론보도와 전문가 인터뷰 등을 통해 RCEP 발효 시 우리 수출과 경제에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수렴되는 듯하다. 다만 여러 매체에서 눈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은 잘 적시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적 이익은 소홀히 하는 것 같기에 병행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중요한 이익은 상품서비스에서의 추가 시장개방을 확보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부분은 잘 지켜냈다는 점이다. 특히 한아세안 FTA를 상당히 업그레이드해 자동차섬유 등 한국산 상품에 대한 아세안 국가들의 시장개방 수준을 79.1~89.4%에서 91.9~94.5%로 상향시켰다. 일본과는 최초로 FTA를 체결한 것으로 섬유농산물 등에서 대일 수출 확대가 기대된다. 반면 자동차, 기계 등 민감품목은 철저히 보호했는데, 특히 소재부품장비 품목은 약 80% 이상을 양허제외, 장기철폐 등으로 보호했다. 농수임산물의 경우 추가 개방을 최소화했다. 특히 쌀, 고추, 마늘, 새우 등 주요 민감품목은 양허제외로 보호하고, 열대 과일 등 일부 개방품목도 관세를 일부 감축하거나 10년 이상의 장기철폐로 양허했다. 서비스의 경우 아세안 국가의 문화콘텐츠, 물류서비스 등을 상당 부분 개방해 우리 기업의 시장 진출 가능성을 높였고, 발효 후 6년 내 시장개방을 달리 명시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모든 서비스를 개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일부 분야에 대해 현재 자유화 수준보다 더 많은 제약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자유화 후퇴 방지 메커니즘인 래칫(rachet) 조항도 마련했다. 규범 측면에서는 역내 15개국 간 교역에 적용하는 단일한 원산지 기준을 도입해 FTA 활용 편의성을 높였고, 협정 참여국 전역에서 재료를 조달가공하더라도 재료누적을 인정해 공급망 제고 기반도 마련했다. 지재권 분야에서는 저작권, 특허, 상표, 디자인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보호 규범과 온라인 지재권 침해에 대한 구제 기반을 마련해 최근 문화콘텐츠의 소비 성향을 반영했다. 아울러 한아세안 FTA에는 없던 전자상거래 챕터도 신규 도입해 비대면 경제 활성화 기반도 마련했다. 신남방 지역 내 전략적 이익 확보 하지만 RCEP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매우 중요한 성과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신남방정책으로 대변되는 역내에서의 전략적 이익 확보다. RCEP의 자유화 수준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만큼 높지 않아 효과가 떨어진다는 일부의 지적은 이러한 전략적 이익을 간과한 측면이 있는 듯하다. 아세안은 지난 30년간 우리와 교역이 30배, 투자가 40배, 상호방문객이 40배나 증가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고 앞으로의 협력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아세안이 주도한 RCEP 협상에 참여하는 것을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중국일본의 대아세안 전략,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전략 등의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참고로 일부 전문가들이 RCEP을 중국 주도라고 얘기하면서 미중 대결구도하에서 이분법적으로 RCEP을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통상협상이 그렇게 단순한 방정식도 아닐 뿐더러 실제 협상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RCEP은 중국 주도가 아니라 아세안이 주도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중국 주도의 협상이라면 최근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호주는 왜 참여했고 일본은 왜 참여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이익은 RCEP이 협력 플랫폼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8년간 협상을 하면서 RCEP 담당자들은 수시로 연락하고 마주해왔다. 그러다 보니 RCEP 이슈가 아니라 다른 현안이 있을 때에도 RCEP 채널을 통해 정부관계자 간 회의를 주선하기도 하고 해결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 RCEP이 발효돼 공동위원회, 사무국 등이 공식 출범하게 되면 이 채널을 통해 여러 가지 협력 의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RCEP은 아세안 10개국 중 6개국, 비아세안 5개국 중 3개국이 비준서를 기탁하면 60일 후 발효된다. 정확한 발효시점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RCEP 참여국 간 조기 발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각국은 조기에 비준절차를 밟고자 노력할 것으로 예상되고, 우리 정부도 영향평가 등 필요한 절차를 거쳐 국회 비준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얼마 전 한 분이 RCEP 협정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던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답변을 해줬는데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는 그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RCEP을 지난 8년간 추진하면서 밤늦게까지 협상에 참여해 한 글자라도 우리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공무원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RCEP에 투입된 이러한 모든 노력이 우리 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지난 11월 15일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최종 서명되고 중국은 매우 고무되는 분위기다. 리커창 총리는 RCEP 서명은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의 승리라고 강조했고, 향후 중국의 글로벌 통상외교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말쯤 협정이 발효되면 중국의 FTA 체결 국가는 기존 19개국에서 26개국으로 늘어나고, 체결 국가와의 무역 비중도 지금의 27%에서 35%로 커지게 된다. 미중 무역전쟁의 영향과 EU 회원국들의 중국 견제로 흔들리는 교역구조를 아세안 및 한중일 국가 중심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이번 RCEP 출범을 계기로 중국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글로벌 통상 리더십을 키우려고 할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듯 시진핑 주석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적극 고려하겠다고 언급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적극적인 메가 FTA 참여 배경과 향후 통상정책 방향이 교역확대를 넘어서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첫째, 중국은 선진국 중심의 메가 FTA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디지털경제로의 질적 성장을 이루고자 한다. 중국이 체결한 기존 FTA는 대부분 개도국 중심이다. 선진국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서비스 개방과 무역자유화가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경제 성장의 방향성이 과거 저렴한 메이드인차이나에서 첨단산업 내재화를 통한 혁신경제로 변화하면서, 중국은 디지털경제로의 발전을 위해 선진국이 포함된 역내 FTA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있다. 나아가 첨단제품 중심의 미래혁신경제에서 선진경제와 한번 부딪혀볼 만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둘째, 메가 FTA 참여로 미국 주도의 보호무역이 아닌 자유무역을 수호하는 선도국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글로벌 리더로서의 존재감을 내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RCEP 회원국과의 경제적 연대를 통해 중국의 글로벌화와 다자주의 협력 주체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부각시킬 가능성이 높다. 셋째, 중국의 RCEP 참여는 향후 CPTPP 무대 진입을 위한 전초전 성격이 있다. 중국은 글로벌 리더십 확대를 위해 다자통상체제에 편입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인데, 그 첫 번째가 RCEP이고 그 다음이 바로 CPTPP다. 중국 정부는 미국 민주당이 기본 정책노선으로 다자간 무역질서를 강조하고 있고 바이든 당선자가 주변 동맹국과의 관계회복을 통한 CPTPP로의 회귀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미국이 회귀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CPTPP 참여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와의 관계 밀착도도 높이고, 미국이 회귀하기 전까지 CPTPP 내 중국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문제는 중국의 CPTPP 가입이 실제 가능할지 여부다. CPTPP는 국경 간 데이터 이전, 소스코드 요구 금지 등 디지털 무역규범에 있어 RCEP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이 없는 CPTPP 참여 협상을 통해 이러한 민감 이슈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우면서 다른 분야의 개방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주도하려고 할 것이다. 이번 RCEP에서도 모든 디지털 제품에 대해 차별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조항이나 당사국이 서비스 제공의 조건으로 상대국 기업에 소프트웨어 소스코드 이전접근공개를 요구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중국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기존에 개방하지 않았던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전자적 수단에 의한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이 적용 대상인 사업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내용에는 합의했다. 기존 한중 FTA 협정문의 전자상거래 챕터는 강제조항이 아니라 권고조항에 불과했기 때문에 우리 기업 입장에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산지 증명에 있어 기존 한중 FTA는 기관증명 방식이지만 RCEP에서는 기업 스스로 증명하는 자율증명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도 좀 더 유연하고 능동적으로 CPTPP 참여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향후 미중 모두 참여하는 초대형 메가급 FTA와 한중일 FTA에 대비한 좀 더 촘촘한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이제 양자 및 다자 FTA가 뒤섞여 있는 스파게티볼 효과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향후 다가올 디지털 무역의 변화에 대비한 제도 및 규범 협력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체결로 그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급망상 단절고리였던 일본과의 FTA 기회를 확보하게 됐다. 2017년 1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함께 격화일로에 있는 미중 갈등과 2019년 7월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로 최악의 상태인 한일 관계 속에서 RCEP에 대한 기대감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그 의의를 최초의 메가 FTA, 탈중국화시장다각화의 포석, 신남방정책과의 시너지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정부는 RCEP이 한일 관계 개선의 지렛대로 작동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지난 12월 초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이 주도하고 있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대한 참여 의사를 표명했는데, RCEP보다 무역자유화율이 높고 전자상거래, 국영기업, 지식재산권 등에서 일본 정부가 누누이 강조하는 21세기형 FTA 규범이라는 통상규범을 갖춘 CPTPP에 한국이 참여하는 방안이 간접적으로나마 한일 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일 통상 관점에서 RCEP 발효 후 효과가 기대되는 분야는 상품무역이지만, 실제 한국 기업이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서 얼마나 가격 인하 효과를 향유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먼저 RCEP이 규정하는 한일 관세철폐율은 83%인데, 한EU FTA의 경우는 94%, 한미 FTA는 95%에 달한다. 더군다나 현재 일본에 대해 한국이 무관세를 적용하는 품목 수(HS코드 10자리 기준) 비율은 농림수산품 3.8%, 공산품 18.9%, 전체 평균 16%인데, RCEP 발효 즉시 철폐율은 농림수산품 14.8%, 공산품 47.9%, 전체 평균 41.4%로 그 변화폭은 높다고 할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한일 관세철폐율 83%(농림수산품 48%, 공산품 91.5%)는 RCEP이 발효되고 2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의 시장개방도다. 그간 한일 간 FTA 재협상과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한일 관세 비대칭성 문제, 즉 한국이 일본에 비해 관세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관세 부과 품목 수가 더 많다는 문제가 RCEP 체결을 계기로 다소 완화된 것은 사실이나 근본적 해결에는 다소 시간을 요하거나 CPTPP와 같은 다른 FTA 협상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적 관점에서라도 RCEP이 가져올 한일 무역효과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한국이 고질적으로 대일 무역수지 적자를 시현하고 있는, 다시 말해 대일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공산품에 대한 대일 관세양허폭은 매우 소폭이다. 이미 대일 경쟁력을 확보한 철강은 대부분이 이미 무관세고, 일반기계의 경우 1천cc 이상 피스톤엔진, 1천~4천cc 디젤엔진, 자동차용 엔진부품, 지게차 트럭이 관세철폐 예외 품목이다. 운송기기의 경우는 승용차, 화물자동차, 기어박스 등에, 전기기기의 경우는 리튬이온 축전지, 점화플러그, 60V 초과의 계전기, 1천V 이하의 전기제어반에 현행 관세를 유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RCEP 발효 즉시 관세철폐가 예정된 공산품을 중심으로 일본으로부터 원재료와 부품을 수입하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관세철폐에 따른 수입단가 인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RCEP이 한국 정부에 남긴 과제는 따로 있다. RCEP 체결로 한국의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 산업은 한일 관세 인하 혹은 철폐에 따라 수입단가 인하라는 가격 인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있지만, 이는 양날의 칼과 같다.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 이후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인 소부장 경쟁력 강화 정책, 즉 반도체, 디스플레이, 자동차, 전기전자, 기계금속, 기초화학 등 6대 분야를 중심으로 100개 품목을 육성하고자 하는 정책 기조와 충돌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CPTPP 참여를 염두에 두고 소부장 산업의 대일 시장개방이 일본산 소부장 핵심품목의 국산화를 저해하지 않는 방향으로 국내 지원정책을 재설계하는 것이라든지 CPTPP 협상에서 어떻게 국내 소부장 산업을 배려할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및 호주, 뉴질랜드 등 총 15개국이 참여하는 다자 FTA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지난 11월 15일 서명식을 가짐으로써 공식 출범하게 됐다. RCEP은 향후 아세안 10개국 중 6개국 그리고 비아세안 참여국 중 3개국이 비준하면 공식적으로 발효하게 된다. 비록 협상의 막바지 단계에서 인도가 이탈했지만, RCEP 참여 15개국은 세계 인구와 GDP의 30%를 차지하고 있어 RCEP이 발효하게 된다면 아태 지역의 경제통합 및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아세안이 주도한 다자 FTA로서 RCEP의 성공적인 출범은 최근 보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아시아 지역의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복원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RCEP은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아태 지역 12개국을 규합해 추진했던 다자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자극받은 아세안이 2012년 그에 대한 대안적 경제협력체 구축을 모색하면서 추진됐다. 이미 한중일과 각각 아세안+1 형태의 FTA를 체결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아세안 중심의 지역경제통합을 추구하던 아세안은 오바마 행정부가 TPP를 강력하게 추진함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경제통합의 주도권 상실에 대한 강한 우려감을 갖게 됐다. 특히 TPP에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과 같은 일부 아세안 회원국이 참여하면서 아세안 경제통합 및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 약화 가능성에 대한 강한 우려가 아세안 내부에서 제기됐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아세안은 기존 아세안+1 FTA 파트너인 한중일에 더해 아세안 대화상대국인 인도, 호주 및 뉴질랜드가 참여하는 다자 FTA를 추진했고, 그 결과 2020년 RCEP이 탄생하게 됐다. 이번 RCEP 체결을 계기로 기존에 체결된 한아세안 FTA의 수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세양허가 합의됨으로써 향후 한국과 아세안의 교역 규모는 계속해서 더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세안은 이미 중국에 이어 우리의 제2의 교역상대국으로 부상함으로써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한 파트너가 됐다. 특히 2007년 한아세안 FTA가 발효한 이후 교역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우리의 아세안으로의 수출은 2007년 387억 달러 규모였는데 2019년에는 951억 달러로 약 2.5배 늘어났고, 아세안이 우리의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7.5%로 대폭 확대됐다. RCEP 체결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아세안의 관세양허율은 기존 최대 89.4%에서 94.5%로 확대됨으로써 향후 한국의 아세안으로의 수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동차부품, 철강, 석유화학, 기계, 생활소비재 등에 대한 관세장벽이 대폭 낮아짐에 따라 향후 한아세안 경제협력 수준은 더욱 높아지고 확대될 것이다. 아울러 RCEP 체결을 계기로 우리 정부가 아세안과의 관계 강화 차원에서 추진해온 신남방정책이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우리 정부는 신남방 국가들과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무역투자 협력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 FTA를 적극 활용하고 있고 개발협력 및 인프라 개발 등을 연계한 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RCEP이 향후 발효되면 이러한 신남방정책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특히 RCEP은 단순한 상품교역뿐만 아니라 전자상거래, 중소기업, 스타트업 등과 관련된 조항도 포함하고 있어 향후 한아세안 간 산업협력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제도적 기반을 제공할 전망이다.
20여 년 전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동아시아비전그룹(EAVG)은 동아시아 경제통합의 핵심 사업으로 동아시아 FTA 구축을 제안했다. 원래 동아시아 지역 13개 국가로 논의가 시작됐으나,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이 인도,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포함한 아세안+6 국가 간 FTA를 제안하면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으로 굳어졌고, 8년 전에 시작했던 협상이 타결돼 지난 11월 15일 공식 서명됐다. 그 사이 동아시아 국가들은 많은 양자 간 협정을 체결했지만, RCEP은 범아시아 지역을 아우르는 첫 FTA이고, 부분적이나마 지역 공동의 통상규범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미국 대선에서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승리했지만,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기조의 통상정책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다. WTO 위상 약화 문제는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고, 미국 워싱턴 소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가 판단하듯 어쩌면 WTO가 이미 국제무역 관리 기능을 상실했을 수 있다. 새로운 무역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FTA 네트워크가 WTO 체제를 대체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고, 이번에 체결된 RCEP은 동아시아 역내 무역 유지에 긴요한 장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RCEP의 경제효과 실현을 위한 과제도 적지 않다. 먼저 협정의 조기 발효가 중요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체결된 협정이 통상 2~3년 후 발효됐다. RCEP은 최소 6개 아세안 회원국과 비아세안 3개 국가가 국내 비준 문건을 아세안 사무국에 기탁한 후 60일째 되는 날에 발효된다. 각 국가별 일정과 국내 여건으로 9개 국가 비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으므로 RCEP 사무국 역할을 해온 아세안과의 협력을 통해 조기에 비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RCEP 협정문은 20개 챕터로 구성돼 포괄적인 협정 형태를 갖췄으나, 기존 한아세안 FTA 등 아세안+1 형태로 체결된 무역협정을 부분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으로 구속력 있는 신규 규범이 많지 않다. 17개 부속서 등을 합치면 총 1만5천 페이지가 된다는 것은 통합 협정을 만들지 못해 양자 간 합의 내용을 병렬적으로 나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부분 기존 양자 간 협정과 비슷한 내용이고 한아세안 FTA 발효 초기 관세양허 파악에 혼선이 있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통상당국은 협정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존 협정과의 차이점 등을 설명자료로 작성해 조기에 널리 배포할 필요가 있다. 범지역적 FTA는 역내 무역거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고 원산지 관리 측면에서 유리하다. 통상당국도 RCEP의 원산지 관리 이점을 홍보하고 있다. 이는 누적원산지를 폭넓게 인정할 때 해당된다. 하지만 RCEP은 가장 기본적인 양자누적(15개 회원국 중 쌍방 간에 공급된 재료를 역내산으로 간주)만 인정하고 있어 회원국 간 가치사슬 활성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협상 과정에서 통상당국이 설명했던 교차누적(해당 FTA 회원국이 체결한 다른 FTA의 회원국에 의해 공급된 재료를 일정 조건하에 역내산으로 간주)은 인정되지 않았다. RCEP의 경우 품목별 단일 원산지 기준을 설정한 점을 제외하면 기존 한아세안 FTA와 중국, 호주, 뉴질랜드와 체결한 FTA에 비해 시장개방이나 규범 측면에서 크게 나아진 점이 없다. 통상당국은 조기에 협정을 발효시키고 시장개방 확대 및 교차누적 인정을 위한 업그레이드 협상을 논의해야 한다. RCEP 서명으로 일본과 낮은 수준의 FTA를 체결한 셈이다. 최근 국내에서 일본이 주도해 발효시킨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다. 모든 CPTPP 회원국이 동의해야 가입이 가능한데, 현재의 한일 관계로 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RCEP 발효 후 경제협력 활성화를 위해 양국 간 앙금을 털어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도가 협정 서명에 빠진 것은 아쉽다. 개방정책을 내세웠던 모디 행정부는 중국과의 무역수지 적자 악화 우려를 이유로 2019년부터 RCEP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최근 인도 내에서도 RCEP 참여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므로 인도가 복귀할 수 있도록 외교통상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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