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EU 집행위를 방문했을 때 한국과의 FTA 체결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시 EU 측의 답변은 한국과 양자 간 FTA를 체결하기보다는 한국,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아시아 지역과 통합적으로 FTA를 추진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FTA 체결에 있어 후발주자였던 한국이 2006년 전격적으로 미국과 FTA 협상을 개시하자 EU는 한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한EU FTA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직후인 2007년 5월에 협상이 개시됐는데, 결국 한미 FTA보다 한 해 앞선 2011년 7월 1일에 발효됐다. 한EU FTA는 발효 당시 한국이 체결한 가장 포괄적이고 개방 수준이 높은 무역협정으로 평가됐다. EU는 발효 5년 차에 이미 전체 상품의 99.6%에 대해 관세를 철폐했으며, 발효 10년 차인 현재 한국도 총품목의 98.1%에 대해 관세를 철폐했다. EU 입장에서도 단일시장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국이 아시아 국가 중 첫 FTA 파트너가 됐으며, 게다가 서비스, 지식재산권, 무역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포함한 가장 포괄적인 무역협정을 체결했다는 데 있어 의미가 컸다. 한EU FTA 발효 이후 10년 동안 양자 간 무역과 투자의 흐름을 살펴보면, 한국의 대EU 수출은 큰 변화가 없었던 반면 EU의 대한국 수출은 발효 전 400억 달러에서 최근 600억 달러 규모까지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FTA 발효 이듬해인 2012년부터 한국의 대EU 무역수지가 흑자에서 적자로 반전되자 이러한 변화가 한EU FTA의 효과인 것처럼 평가됐다. 물론 FTA 발효 이후 관세 인하 및 철폐의 혜택으로 유럽 자동차와 소비재 수입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나, 한국과 EU 간 무역은 지난 10년간 FTA 이외의 요인들에 의해 큰 변화를 겪어왔다. 발효 초기 재정위기가 발발해 유럽 내 수요가 부진했고, 한국 기업들이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해외에서의 생산을 늘려감에 따라 EU로의 직접 수출은 그 증가세가 둔화됐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EU 간 무역의 변화를 총량으로만 평가할 경우 자칫 잘못하면 FTA가 EU에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왜곡될 수 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공산품에서 농산물까지 관세철폐에 힘입어 EU에 대한 수출이 증가한 품목들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당초 한국이 EU, 미국과 FTA를 추진한 목적은 관세철폐를 통한 무역 증대에 국한되지 않고, 선진국 시장에 대한 개방을 통해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내 제도의 선진화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지난 10년을 되짚어 보면 한EU FTA는 이러한 목적에 상당히 부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을 필두로 제조업 전반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유럽 국가들은 한EU FTA를 계기로 한국시장을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후 EU 기업들의 적극적인 국내 진출은 한국 기업들이 경쟁을 통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한EU FTA 발효 이후 10년 동안이 상품의 관세철폐가 완성되는 기간이었다면, 이제는 양자 간 경제관계가 보다 성숙한 단계로 도약할 때다.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19 확산, 기후변화 대응 등 FTA 체결 과정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통상환경이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자 간 협력할 분야를 발굴하고 발전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FTA 업그레이드 방향을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
2010년 한국과 EU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EU는 미국과 중국 등 10개국과 이런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전략적 가치가 그만큼 올라갔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동반자 관계 체결로 양자 간 협력이 외교와 안보,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로 확대됐다. 한EU FTA는 EU가 아시아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이었고 비관세장벽 제거, 문화협력 등을 망라한, 이전보다 훨씬 앞선 협정이었다. 아울러 비슷한 시기에 무역과 협력에 관한 기본협정이 개정됐다. 1996년 체결된 한EU 기본협력협정이 주로 경제에 치중됐다면, 2009년에 개정된 이 협정은 외교안보와 테러, 과학기술과 보건 등 광범위한 이슈를 포함했다. 우리와 EU는 양자는 물론이고 지역적글로벌 차원에서도 공동 이슈에 대한 협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2014년 위기관리참여협정 체결로 우리는 EU와 3대 협정을 체결한, 아시아에서 유일한 국가라는 기록을 보유하게 됐다. 이런 틀 안에서 한EU 관계는 그동안 꾸준하게 발전해 왔다. 2017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한 후 보호무역 정책 분위기 속에서 EU는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질서 유지를 실천하는 정책을 이행해 왔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도 자유무역 유지가 매우 중요한 국익이기에 EU가 적절한 파트너였다. 그해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EU에 특사를 파견했다. 정부 출범 후 한반도 주변 4강과 동시에 EU가 특사 파견 대상에 포함된 것은 처음이었다. EU와의 관계를 더 중시하고 공동의 글로벌 이슈에서 적극 공조하겠다는 게 특사 파견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양자 관계의 전반적인 진전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있었다. 대표적인 게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협약 비준 건이다. 한EU FTA에서 우리는 노조의 가입 범위 등을 제한한 관련 법을 개정하기로 약속했다. EU 측이 2018년 문제를 제기해 3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협의한 끝에 2021년 4월 비준 절차가 완료됐다. FTA에 노동 관련 조항이 들어간 것은 한EU FTA가 처음이었다. EU는 이를 관철시키는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EU는 세계 최대의 경제블록이라는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국제 정치경제에서 규범을 만들고 이의 확산에 힘써 왔다. 대표적인 게 탄소국경세다. 중국이나 우리처럼 탄소 순수출국의 경우 FTA를 체결했더라도 별도의 추가 관세를 부담해야 한다. EU는 2050년까지 유럽을 탄소중립적인 대륙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이 세금은 아무리 늦어도 2023년에 도입될 예정이다. 우리는 탄소국경세의 시행으로 예상되는 통상 분쟁에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중견국 외교를 표방해 왔다. 기후위기 대응과 자유무역 유지처럼 국제사회의 공동 이슈를 적극 추진하는 데 같은 생각을 지닌 파트너가 필요하다. EU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이런 가치를 공유하는 주요한 파트너로 남을 듯하다. 코로나19 발발로 양자 간의 보건협력도 시작됐다. 팬데믹은 앞으로도 지구촌을 종종 위협할 것으로 보여 이 분야도 새로운 협력의 장이 될 듯하다.
한국과 EU 간의 문화협력은 종종 한국과 유럽 개별국과의 문화협력과 혼동돼 왔다. 이는 EU 출범 이후에도 대중들의 EU에 대한 인식이 상당 기간 EU=유럽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데 기인할뿐더러 문화에 대한 EU의 독특한 시각이 반영된 것에도 연유한다. 문화에 대한 EU의 시각은 한 영토 내에서 공동의 언어와 생활의 유산을 기반으로 공동의 경험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소속감의 원천을 문화로 보는 전통적인 시각과는 차이가 있다. EU는 유럽통합을 달성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문화로 보는 도구적수단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문화정책을 추진해 오고 있다. 이는 EU 내에서 사용되는 24개 언어를 모두 EU 공용어로 인정하고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과도 무관치 않다. 단일한 문화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차라리 각 회원국 고유의 문화를 모두 인정해 주고 공존하고 통합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EU 문화정체성의 실체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문화를 신성장동력의 원천으로 전환하자는 것이 EU의 전략이기도 하다.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고 있는 현재, 고령화저성장 시대에 당면한 EU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그 핵심 키워드로 문화를 꼽은 것이다. 실제로 EU는 한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한EU 문화협력의정서를 채택했다. 문화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프랑스 등 일부 회원국의 입장을 고려하면서도 EU의 미래 창조산업의 핵심이 문화 분야인 만큼 양가적 입장을 절충해 반영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간 협정에 문화협력의정서를 채택한 사례는 한국의 경우 한EU FTA가 처음이었으며, EU는 2008년 카리브 15개국과의 경제동반자협정(EPA)에서 처음 도입했다. 문화협력의정서의 채택은 EU의 적극적인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협력의정서에서는 시청각물 공동제작을 강조한다. EU는 유럽지역 내 40여 개 업체로 구성된 유럽애니메이션협회를 지원해 매년 카툰 커넥션이라는 콘텐츠 마케팅 행사를 개최해 왔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을 유일하게 파트너로 선정했고, 2010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과 유럽 등지의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한자리에서 만나 미팅을 하고 투자를 논의하는 장을 마련해 왔다. 2010~2019년 한EU 간 공동제작 현황은 26편으로, 주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과 진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까지의 최근 3년간 실적은 3편에 불과해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이나, 국내 애니메이션 작품의 대유럽 수출 금액은 2010년 1,900만 달러에서 2018년 3,300만 달러로 무려 74%에 달하는 성장세를 기록했다. 이는 한류로 인해 K팝, K드라마 등 K콘텐츠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가 제고된 연유로 보인다. 실제로 유럽의 한류에 대한 관심은 유럽 내 한국문화원 개원으로 이어져, 네 군데에 불과하던 것이 최근 10년간 9곳으로 확대됐다. 한EU 간 문화협력은 EU의 이니셔티브에 기반해 본격화됐지만, 내실 있는 협력 관계를 위해서는 우리 측의 보다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국내 관련 업계 종사자들과의 지속적인 소통 채널 구축을 통해 공동제작 시의 애로점 등을 파악하고, 정책 개선과 보완을 통해 협력의 장을 주도적으로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 K콘텐츠에 대한 유럽 내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제는 한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K콘텐츠의 힘을 보여줄 때다.
EU가 통상협정 안에 노동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이하 노동조항)를 도입한 것은 1995년이다. 그러나 현대적 노동조항의 틀을 구축한 첫 무역협정은 한EU FTA로, 주요 특징은 이렇다. 첫째, 협정의 노동조항은 단순한 정치적 선언이 아닌 법적 의무를 창설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협정 당사국의 국내 노동법을 실효적으로 집행할 의무는 물론, 국제기준에 따라 국내법과 관행을 정비하고, 무역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노동보호 수준을 완화하지 않을 의무도 추가했다. 나아가 국제노동기구(ILO)의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의무도 부과했다. 둘째, 노동조항의 의무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 ILO와 유엔의 여러 문서를 폭넓게 인용하도록 했다. 셋째, 노동조항 이행 확보를 위해 정부 및 시민사회 간 대화와 협력에 의존하도록 했다. 최종 분쟁해결 절차인 전문가패널이 협정 위반을 판단하더라도 승소국은 이를 이유로 협정조항에 직접 근거해 패소국에 무역제재를 가할 수 없다(그러나 노동 문제가 국제통상 맥락 속에서 논의되는 한 양자의 실질적 관련성은 그렇게 간단히 일소되지 않는다). 노동은 오랫동안 국내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효과적인 이행강제수단이 없는 탓에 회원국으로서 이행해야 하는 기본적 의무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8년이 끝나갈 무렵 노동 이슈는 외교 문제와 통상 문제가 됐으며, 기본협약 비준 문제가 언론에서 주요하게 다뤄졌고 이는 한EU FTA에 기인한 바가 크다. EU는 협정 제13장에 근거해 2018년 12월 17일 협의를 요청했고 2019년 7월 4일 전문가패널의 소집을 요구했으며, 2020년 10월 8~9일 온라인으로 심리 절차가 진행됐다. 협정이 발효되고 햇수로 10년째 되는 올해 1월, 이 분쟁에 대한 전문가패널의 보고서가 발표됐다. 두 분쟁 당사자는 서로의 승리를 선언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기본협약 비준을 위한 지속적 노력 의무와 관련된 쟁점에 대해서는 전문가패널이 한국의 손을 들어줬고, 당시 발효 중이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일부 규정이 ILO의 결사의 자유 원리를 존중촉진실현할 의무에 위반된다는 쟁점에 대해서는 EU의 주장(자영업자의 단결권 제한, 조합원의 자유로운 노동조합 임원 선출 제한 등)을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EU와 한국의 노동조항 관련 분쟁은 협정의 노동조항 위반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역사상 첫 번째 사례로서 상징성이 있다. 전문가패널의 논증과 법리가 향후 관련 분쟁의 판단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분쟁이 시작된 이래 한국 정부는 대외적으로 전문가패널 절차에 대응하는 것 외에도, 대내적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2020년 6월에, ILO 제29호, 87호, 98호 협약 비준동의안을 그다음달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법률개정안은 국회에서 다소 수정돼 그해 12월 본회의까지 통과했다. 비준동의안은 해를 넘겨 올해 2월에 통과됐고, 이에 정부는 4월 20일 ILO에 3개 협약 비준서를 기탁했다(비준은 1년 후 발효). 이러한 행보의 이면에는 EU와의 외교통상 리스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는 목적이 크게 자리했다. 외부의 압력이 주된 동기였기에 개정된 법률은 노동계경영계, 전문가 등으로부터 다양한 측면의 일리 있는 비판을 받았다. 여전히 국제기준에 미달한다는 평가, 우리 노사관계 현실에 대한 세심한 고려와 일관된 원리가 결여된 협약비준용 개정이라는 시각, 명확하지 않은 법문으로 인한 법 해석적용의 어려움 등이 대표적 예다. 제기된 문제는 앞으로 노사자치, 노동행정, 조정심판 및 소송 등을 통해 차차 해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한EU FTA의 노동조항과 분쟁이 우리 노동 관련 제도관행을 국제기준에 한층 더 가깝게 만드는 모멘텀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EU와 개별 회원국 차원에서 이뤄지는 핵심노동권을 포함한 인권 실사의무(due diligence) 법제(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관련 국제기준을 준수하는 것은 이제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는 국가와 기업에 출입증이 될 것이다. 개정법률 시행을 기점으로 국가 제도만이 아닌 기업의 관행에까지 국제노동기준이 스며들기를 기대한다.
한영 양국 정부는 브렉시트 이후 원활한 통상무역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2019년 8월 FTA를 체결했다. 한영 FTA는 지난해 말까지 각각 국내적 효력발생 조치를 완료해 올해 1월 1일부터 발효 및 시행됐다. 이를 통해 양국 기업들은 기존의 한EU FTA에서 제공되던 특혜무역 혜택을 브렉시트 이후에도 양국 간 교역에서 그대로 적용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영국의 주요 교역대상국 중에서 선제적으로 FTA를 체결함으로써 지난 2년간 양국 기업들에 충분한 예측 가능성을 제공하고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편 영국의 핵심 우방국인 미국,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나라들도 아직까지 영국과 FTA 협상 중인 점을 감안하면, 한영 양국이 상호 간 경제협력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하는 파트너라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한영 FTA는 기존 한EU FTA를 사실상 복제한 무역협정으로, 양국 간 교역관계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측면에 초점을 둔 만큼 새롭고 미래지향적인 내용을 포함한 새로운 FTA가 필요했다. 이에 양국 정부는 FTA 체결 당시 발효 후 2년 내 새로운 FTA를 위한 협상을 개시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신규 FTA 논의에서는 디지털교역, 개인정보 및 데이터산업, 투자 규범 등 새로운 통상협력 요소들이 다뤄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특히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경제가 활성화돼 새로운 시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점에 주목할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정부의 경제통상 정책의 특징은 친환경산업 전환, 전 세계 무역지평 확대, 우방국 중심 경제질서 재편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지난해 11월 보리스 존슨 총리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산업혁명 10대 전략을 발표했는데, 이는 에너지, 교통, 건설 등 다수의 실물경제 분야를 포괄하고 있어 사실상 신산업전략의 일환이다. 따라서 영국이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풍력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 전기차 등 친환경자동차배터리 분야 등에서 우리 기업의 새로운 시장 창출 기회가 전망된다. 실제로 지난해 영국이 수입한 전기차 중 한국산이 3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앞으로 이러한 분야의 시장 잠재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영국 정부는 올해 말까지 총무역량의 80%를 차지하는 국가들과 무역협정을 체결한다는 목표 아래 개별 국가와 양자 무역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브렉시트 이후 새로운 무역파트너로 아시아 국가를 주목하고 있는데, 지난해 일본, 싱가포르, 베트남 등 아시아 주요 교역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했고 CPTPP를 통해 아세안 전반에 대한 시장 접근을 추진 중이다. 다만 최근 영국이 체결한 무역협정 일부에는 기존 EU와의 무역협정 복제를 넘어 디지털무역, 투자 협력 등과 같이 새로운 협력 내용이 추가되고 있어 우리나라 역시 영국과의 새로운 FTA 논의가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영국 정부는 우방국 중심 경제질서 재편 역시 글로벌 공급망 강화와 연계해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미국 등 전통적인 서방국가와 안보경제 공조를 강화하는 차원인데, 특히 중국에 대한 견제가 여러 방면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올해부터 시작하는 5G 통신망 신규 구축사업에서 화웨이를 배제하고 기존 화웨이 장비 역시 2027년까지 교체하기로 했다. 그간 중국이 다수 참여해 온 원전인프라 사업에 대한 재검토도 진행 중이다. 지난 4월에는 「국가안보투자법(National Security and Investment Act)」을 제정해 대부분의 기술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과도한 경제의존도 완화와 건전한 공급망 형성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그간 중국 기업들이 장악해 왔던 영국 내 많은 산업 분야에서 새로운 기회가 창출될 것이며, 특히 통신전자 등 첨단기술 분야, 기계조선건설 등 인프라 투자 관련 분야에서 협력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월 18일 EU 집행위는 새로운 통상전략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전략의 핵심 키워드는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Open Strategic Autonomy)이다. 이는 세계시장 내 장벽 없는 경쟁과 교류가 EU 및 세계경제의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원칙(개방형)을 고수하면서도 EU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전략적 자율성)을 함께 반영한 결과다. 디지털, 환경 등 핵심 분야에서 국제표준 주도하려는 EU 다자주의 약화, 미중 및 미EU 간 무역 갈등, 디지털 및 친환경 전환, 코로나19 유행 등 대내외 통상환경 변화에 대한 EU의 대답이 바로 이번 통상전략이다. 특히 전략적 자율성은 그간 EU가 추진해 온 산업 및 통상 정책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EU 집행위는 2019년 출범 후 4개월 만에 발표한 신산업전략에서 이미 기술, 식량, 인프라, 안보 등 전략산업 부문의 해외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한 바 있다. 또한 코로나19 유행은 역내 공급망 강화라는 기존의 움직임을 강화했는데, EU는 이번 위기를 통해 그 중요성이 강조된 제약 및 보건 분야 제품에 대한 비상시 접근성을 높이고자 의약품의 역내 생산 비중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아울러 EU의 중점 사업이었던 유럽 그린딜과 디지털 전환 등 핵심 분야에서 EU 주도의 국제표준을 마련하고 역내 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강조했다. 무역관행 및 노동, 환경, 인권 등의 규범에 대한 구속력 있는 규제를 수립하겠다는 목표도 내세웠다. 이 같은 일련의 조치로 여러 가지 변화가 예상되므로 한국 정부 및 기업들의 대응이 요구된다. 우선 이번 신통상전략이 시행됨에 따라 EU 회원국 기업의 리쇼어링(reshoring) 및 니어쇼어링(nearshoring)이 활발해질 전망이다. 유럽은 글로벌 가치사슬(GVC) 다각화와 전략산업 보호를 위해 기업 차원의 리쇼어링 정책을 지원하고 있으며, 친환경자동차 및 의약품 산업 내에서 EU 역내 기업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움직임이 이미 감지되고 있다. 프랑스 정부는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재정난에 직면한 르노자동차에 국내 공장 생산량 증대를 조건으로 50억 유로의 긴급자금 대출을 제공했고, 이에 르노자동차는 중국 공장 생산 물량을 폐쇄 예정이던 프랑스 공장으로 옮기기로 합의했다. 또한 폭스바겐은 EU가 출자한 노스볼트와의 협업을 통해 자체 배터리 생산을 늘릴 예정임을 발표했다.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면서 지난 2월 백신 수출 제한 조치를 단행한 이력도 있다. EU 회원국 생산 물량에 대한 역내 사용 주장이 힘을 얻을 뿐 아니라 향후 원재료 및 완제품의 자체 생산량 비중도 늘릴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신통상전략은 디지털 및 환경 분야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예고한다. EU가 주도하는 디지털 분야 신기술의 국제표준 경쟁과 데이터 및 개인정보 관련 규제가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에 대비한 맞춤형 지원과 관련 법령 정비가 필요하다. 특히 EU가 전략산업으로 지정해 육성하는 로봇 공학,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E), 고성능 컴퓨팅 및 데이터 클라우드 인프라, 블록체인 등의 산업 분야에서 국내 기업이 경쟁력을 유지하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EU 집행위가 6월 말까지 입법안을 제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 역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다. 온실가스배출권거래제 확대가 유력하게 점쳐지는 가운데, 국내 기업의 기민한 대응이 요구된다. 무역과 지속 가능 개발 등의 조항은 실제 투자행위에도 영향 미쳐 마지막으로, EU가 환경, 노동, 인권, 젠더 등 규범과 관련된 조항 이행을 더 강하게 요구하며 일종의 무역장벽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한EU FTA에서 최초로 독립된 장으로 삽입된 무역과 지속 가능 개발(TSD; Trade and Sustainable Development) 장은 이후 EU가 체결하는 모든 무역협정에 포함돼 왔다. 이러한 조항은 실제 투자행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6월 수출입은행과 한국전력공사 등이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의 석탄화력발전소에 투자했다가 유럽의 연기금 운영사로부터 투자 철회 압박을 받았다. 같은 해 EU가 한국의 노동 규약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해 중재 패널의 판단을 받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이 TSD 장의 조항을 실제 위반한 것으로 결론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향후 EU와의 파트너십을 이어가는 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EU의 신통상전략은 급변하는 대외환경에 맞서 EU 회원국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통상전략에서 제시한 밑그림 위에 공급망 강화, 산업정책 개편, 해외보조금 규제 강화, 외국인투자심사제도 강화 등 일련의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다(〈표〉 참고). 이러한 변화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만큼 EU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통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을 확대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아울러 우리 기업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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