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최초의 동독 출신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2005년 11월 중순부터 독일을 이끌어왔던 그가 지난 12월 7일 퇴임했다. 제2 공영방송 ZDF 조사에 따르면 퇴임 때 지지도는 70% 정도였다. 그의 임기 동안 EU는 경제와 난민 등 위기의 연속이었다. 메르켈은 위기의 총책임자가 돼 위기 극복에 앞장섰고 유럽통합을 몇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너무 늦은 미미한 조치에서과감한 경제회생 정책으로 2010년 상반기 그리스는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유로존 회원국 및 IMF로부터 지원받았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위기는 이후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즉 피그스(PIGS) 국가로 전이됐다. 유로존 회원국들은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단일화폐를 쓰기 때문에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경쟁력을 회복할 수 없다. 유로존 차원의 구제금융 제공은 이를 금지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때문에 거의 6개월이 걸렸다. 이 때문에 유로존은 국제 정치경제에서 위기의 진원지가 됐다. 너무 늦게 겨우 위기에 대처할 만한 미미한 조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0년 6월에 설립된 유럽금융안정기금(EFSF; 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은 구제금융을 제공받은 국가를 제외한 유로존 회원국들이 경제력에 비례해 지급보증을 해주는 임시 기구였다. 2년이 지나 EU 회원국들은 유럽판 IMF 역할을 하는 유럽안정메커니즘(ESM; European Stability Mechanism)을 만들었다. ESM은 항구적 구제금융기구로서 총 5천억 유로의 대출 여력을 지녔다. 여기에 더해 금융기관의 감독과 청산 권한도 EU 차원으로 이양됐다. EU는 최악의 위기 앞에서 이런 조치를 실행해 통합을 진전시켰다. 2020년 기준 유로존 경제력의 27.8%를 차지한 독일의 경우 베짱이 피그스 국가 지원에 대한 반대가 거셌지만 메르켈 총리는 리더십을 발휘해 이런 반대를 극복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7월 말 합의한 유럽경제회생기금(ERF; European Recovery Fund)은 7,500억 유로의 규모일 뿐 아니라 재정 이전의 성격을 지녔다. 메르켈 총리가 주도해 프랑스와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사전 조율을 했고 EU 수반들이 모인 유럽이사회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EU 집행위원회가 국제자금시장에서 유로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충당한다. 2010년 경제위기 당시 독일이 레드라인으로 간주했던 재정 이전이 팬데믹 위기 대응책에서는 사실상 무너졌다. 난민정책은 아직도 진행 중극우정당의 세력 대두로도 이어져 2015년 7월부터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주로 중동지역의 난민 신청자들이 헝가리를 경유해 독일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EU 난민정책을 규정한 더블린 규약에 따르면 첫 도착국에서 난민 신청자의 수용과 난민 지위 인정 결정 등 모든 절차가 마무리돼야 한다. 하지만 몰려든 수십만 명의 난민 앞에서 EU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메르켈은 결단을 내려 1백만 명 정도를 수용했다. 반면 EU 회원국 내에서 난민의 배분이 거의 이뤄지지 않자 메르켈은 터키와 난민협약을 성사시켰다. 이 협약을 통해 EU는 역내로 들어오는 불법 난민을 터키로 송환하는 대신 합법적인 난민을 수용하고 터키에는 60억 유로의 경제지원을 제공했다. 인권선진국을 자부하던 EU는 점차 반민주적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난했었다. 그러나 난민협약 체결로 EU는 사실상 터키의 반민주적 정치에 대한 정책적 지렛대를 상실했다. 또 독일에서는 쇄도한 난민에 대한 반감으로 반이민(반이슬람)과 반EU를 내세운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대두했다. 2017년 9월 총선에서 AfD는 12.6%의 지지를 얻어 연방하원에 첫 진출했다. 2021년 9월 총선에서도 이 정당은 10.3%를 얻어 여전히 하원에서 활약 중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독일에서 극우정당이 하원에 진출해 우려가 컸지만, 기존 정당들이 AfD를 배제하는 정책을 실행해 왔다. 반면에 EU 차원의 난민정책 개정은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는 리더십을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으로 분류했다. 변혁적 리더십은 상황이나 구조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경한다. 유럽 정책에서 메르켈은 초창기에는 위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거래적 리더십을 보였으나 팬데믹과 같은 더 큰 위기에 대처하는 데서는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반면 국내 정책에서는 원전 폐기 정책을 번복하고 디지털 전환에 더디게 대응해 비판을 받았다. 원래 2008년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의 대연정 당시 메르켈은 2022년까지 원자력 발전소 운영 중단을 공약했다. 그러나 2009년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한 메르켈은 이를 번복하고 2030년대 초까지 원자력발전소 운영을 허용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폐기 여론이 압도적이자 그는 다시 2022년까지 폐기를 앞당겼다. 선거를 앞둔 갑작스런 정책 변경이라는 비판이 지속됐다. 2017년 보호무역과 미국 우선 정책을 내세운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EU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자로 고군분투했다. 당시 메르켈은 서방세계의 자유무역 옹호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포용과 신뢰의 리더십을 보여준 메르켈을 이제 원로 정치인으로 국제무대에서 볼 수 있길 기대한다.
독일의 중도좌파 성향의 두 정당 사회민주당(사민당)녹색당과 자유시장주의의 자유민주당(자민당)이 구성하는 신호등 연정(사민당의 빨간색, 자민당의 노란색, 녹색당의 녹색을 합쳐 칭하는 별칭)이 지난 12월 8일 공식 출범했다. 탄소중립 목표 등 정치적 성격이 짙은 주요 현안에 대한 견해차로 2021년 내 출범이 불가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깬 것이다. 올라프 숄츠가 이끄는 새로운 독일 정부는 더 많은 진보를 위한 시도(Mehr Fortschritt wagen)라는 제목으로 제시한 연정 협상문을 통해 사회적생태적 시장경제 전환을 통한 탄소중립 달성, 신속한 디지털 전환, 더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복지 강화 등 독일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예고했다. 새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및 디지털 전환가속화로 우리 기업에도 기회 확대 총선 당시 독일인들이 최우선 과제로 꼽았던 기후변화 대응 관련 정책이 가장 눈에 띈다. 새 정부는 2045년까지 독일을 탄소중립 산업국가로 전환하기로 하고, 탈석탄 목표를 2030년으로 이전 정부보다 8년 앞당기는 등 기후총리(Klimaskanzlerin)라고 불렸던 메르켈의 정부보다도 더 급진적인 환경정책을 내놓고 있다. 향후 독일 정부는 탈석탄 달성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연간 총전력수요 약 680~750 TWh 중 8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할 예정이며, 이를 위해 2030년까지 태양광 200GW, 해상풍력 30GW를 확대하고 신축 사업용 건축물에 태양광발전설비를 의무화하며 국토의 2%를 육상풍력발전에 할당하는 등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대를 추진한다. 또한 2030년까지 독일을 세계적 대표 수소시장으로 변혁하고 전기차 1,500만 대를 보급하는 등 환경 친화적인 산업구조로의 전환을 예고했다. 로베르트 하벡 녹색당 공동대표는 기존의 연방경제에너지부(BMWi)를 연방경제기후보호부로 확대 개편한 슈퍼 환경부처의 장관을 맡아 재생에너지 발전 인프라 확대 관련 행정법규 마련에 속도를 내는 한편, 관련 분야 연구개발(RD)에 GDP의 3.5% 이상을 투자할 수 있도록 정책을 추진한다. 독일 신정부의 환경정책 변화는 우리 기업에 기회가 될 수 있다. 먼저, EU 주도의 수소인프라 구축 프로젝트 등 굵직한 수소경제 관련 설비투자가 확대되면서 독일 학계와의 RD 협력 및 수소경제 선도기업과의 협력이 기대된다. 토탈, 로얄 더치 쉘, OMV 등 에너지 기업과 린데, 에어리퀴드 등 산업용 가스 제조사 등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전기차 충전소를 2021년 말 현재 약 2만6천 개에서 2030년에는 총 100만 개까지 늘린다는 계획에서 우리 기업의 프로젝트 참여 등 시장진출 기회가 보인다. 한편 향후 독일 정부가 모든 산업에 무탄소 공정을 요구함에 따라 화학, 시멘트 등 일부 산업에서 생산비용 증가에 따른 부담이 커지며 자국 산업 보호조치 등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비해 우리 수출 기업은 제품 생산부터 유통에 이르는 비즈니스 과정의 친환경화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새 정부는 독일의 디지털 전환도 적극 추진한다. 메르켈 정부 당시 독일의 유엔 전자정부 발전지수는 2018년 12위에서 2020년 25위로 하락한 바 있다. 이처럼 낮은 디지털화 수준은 항상 독일의 아픈 손가락으로 지적된다. 숄츠 총리는 이번 정부에서 독일의 빠른 디지털화 이행을 약속해 민첩하고 디지털화된 국가로의 전환을 예고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국 광통신망(FTTH) 공급 등 대규모 5G 인프라 사업을 시작으로 전자정부(디지털 행정), 교육 및 의료 분야 디지털화, 정부와 연방주 간 IT 인터페이스 표준화를 추진한다. 2022년 상반기 중에는 연방-주-지자체 간 학교 디지털화 해법을 마련하고 공공기관 IT 장비와 인력을 확충한다. 디지털 인프라기술 투자 기업에 대한 세제혜택 및 인센티브도 도입하기로 했다. 독일 정부의 디지털 전환 가속화에 따라 우리 IT 네트워크 및 5G 서비스 관련 기업의 사업 기회도 확대될 전망이다. 시민수당 도입, 공공주택 공급 확대 등 공정한 분배와 주거권 보장 추진 독일 유권자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인 연금제도 개혁 등 복지 및 노동 정책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의 의견이 상당 부분 관철됐다. 연정 협상 과정에서 자민당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던 사민당은 연금 최소산정비율(48%) 및 연금수령 연령(만 67세)의 현행 유지를 지켜냈다. 대신 자민당의 주장에 따라 연금펀드 운영을 함께 시행한다. 숄츠 정부는 공정한 분배, 주거권 보장 등을 위해 시민수당(Buergergeld)을 도입하는 한편 최저임금을 9.6유로에서 12유로로 인상한다. 또한 연방부동산관리청(BImA)을 신설해 연간 주택 40만 호를 공급하되 그중 4분의 1은 공공주택으로 공급한다. 아울러 주택 임차료 인상률은 향후 3년간 11% 이하로 억제하기로 했다. 선거 당시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을 정부 예산의 50% 이하로 제한하는 등의 공약을 내세웠던 자민당은 정부의 주택공급 확대에 동의하는 대신 향후 연방주들의 토지취득세 부과 자율화, 비과세 혜택 확대를 통한 부동산거래 부담 완화를 주장해 최종 협상 타결을 이뤄냈다. 자민당은 이번 연정 협상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에 환경 및 복지 정책의 상당 부분을 양보하면서도 재무부 장관직(자민당 대표 크리스티안 린트너)은 끝까지 사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린트너 자민당 대표는 재무장관 직무 시작과 동시에 2021년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발행한 국채 미사용분 약 600억 유로를 탄소중립 및 디지털 혁신 등 주요 혁신과제 예산으로 전용하는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는 국채 발행 규모를 최대한 줄이면서 향후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및 디지털 혁신 추진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숄츠 총리가 이끄는 신호등 연정은 출범하자마자 수많은 국정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먼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위기대응반(Krisenstab)을 총리실에 설치하고 감염병 대응 관련 학제 간 전문가위원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러시아와의 외교관계 불확실성에 따른 에너지 비용 상승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적외교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중국과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신호등 연정 구성 정당 간의 상호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숄츠 총리는 앞서 11월 24일 첫 연정 협상안을 발표하며, 신호등 연정은 각자 지향점이 다르지만 독일의 발전에 대한 믿음과 이를 위한 의지에서는 서로 일치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번 연정이 안정적인 협치를 지속해 사민당이 추구하는 공정한 분배와 복지국가, 녹색당의 기후변화 대응 그리고 자민당의 자유주의 실현 및 관료주의 철폐 등을 현실화할 수 있을지, 그에 따른 독일 사회 및 산업의 구조적 전환이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과 기회는 무엇인지 향후 독일 정부의 행보에 지속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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