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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팍스 시나카’는 오지 않는다
박경철(안동신세계연합병원장) 2007년 06월호
일부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전쟁은 소통수단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먼저 ‘원시전쟁시대’는 언어의 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서로 조직화되고, 각각의 단위들 사이에서 서로 힘이 불균형을 이룰 때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대전쟁시대’는 문자의 사용과 관계가 있다. 모든 지식은 문자에 의해 기록되고 축척되어 승수화되었고, 이 결과 문명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물론 이 과정에 뒤쳐진 지역과 앞선 지역의 격차가 부의 격차를 유발했음은 불문가지이다. 이 시대의 전쟁은 야만이 문명을 압도했다. 문자중심으로 전개된 문명은 제도와 상행위, 초보적인 법질서를 바탕으로 조직화 되었지만 무력에는 상대적인 약세를 보였다.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한 경작물과 초기무역을 통해 확보한 부를 향유한 집단과, 단지 생존을 위해 거칠게 살아온 집단과의 투쟁은 결과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고대전쟁은 부와 문명의 재분배 역할 수행

하지만 인류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피정복지는 야만의 정복자들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화수분이었고, 정복자는 자신들의 척박한 땅을 떠나 피정복자의 기름진 구역에 이주를 하거나, 정착을 하고 왕조를 세웠다.

‘근세 기술문명의 시대’에는 기술이 소통의 수단이 됨으로서 고대이래 유지되어 온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 시대는 인쇄술과 화약의 발명 및 교통수단의 약진을 가져온 15세기부터 현재까지로 과거와 달리 문명과 무력이 일치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부터는 문명을 축척한 지역이 더 강한 무력을 가짐으로서, 전쟁이 가지고 있던 분배기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익부, 빈익빈의 질서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이로서 앞선 문명과 넓고 비옥한 토지, 강한 무력을 동시에 가진 국가들이 그 이전까지 야만이라 부르던 지역을 반대로 침탈하고 지배했다. 하지만 이시기의 정복자들은 과거의 정복자들과 달리 정복지를 경영했을 뿐 이주와 정착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수만년을 이어온 역사적 항상성이 급격히 무너졌다. 이때부터 문명국들은 선진국이라 불려졌고, 그들은 상대적 후진국을 지속적으로 침탈했다. 그리고 세계질서는 균형을 상실하게 되었다. 몇 개의 강대국을 중심으로 세력권이 생기고, 그중에서도 초강대국은 과거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ica) 그리고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이어지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했다.

제국의 공통점은 경영은 하되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송수단과 통신의 발달은 굳이 제국의 중심을 옮기지 않아도 전리품을 거둬 들이는데 문제가 없었고, 거리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외견상 살육을 전제하는 전쟁은 규모는 커졌지만 회수는 줄어들었다. 세계는 거대세력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핵은 대국들의 충돌을 억지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이 시대는 역설적인 평화의 시대였고 사람들은 이 짧았던 시기를 가리켜 ‘냉전의 시대’라고 불렀다.


축적된 자본으로 후발국에 주주권 행사하는 선진국

이때부터 강대국간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각자 세력권에서 힘을 비축했다. 그리고 그 힘의 불균형은 핵이나 총포가 아닌 다른 형태의 무기로 연탄가스처럼 국경을 넘어갔고, 새로운 힘의 불균형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팍스아메리카나로 상징되는 자본전쟁의 시대다.

이 전쟁에서 이긴 서구열강들은 그동안 축척한 부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의 경영을 시작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패한 사회주의국가들이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들 때, 선진국들은 축척된 자본과 기술을 제공했다. 산업측면에서는 후발국들로 생산기지를 이전함으로서 임금대비 기술 경쟁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이다. 더구나 선발국이 가진 기술의 우위는 후발국들의 생산력에 일정 부분의 로열티를 부과함으로서 과거 점령지에 매기던 세수를 다른 형태로 흡수한 셈이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글로벌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했다. 과거의 전쟁이 무력을 앞세워 점령하고 총독부를 세워 지배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전쟁은 축척된 자본으로 실질적 권리를 확보하고 주권에 포함된 주주권을 통해 행사되는 것이다.

후발국 입장에서는 과거 1차 산업에 종사하던 노동력이 급속히 2차 산업으로 이동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절대적인 질은 향상되지만 상대적인 질은 하락한다. 또 초동기에 1차에서 2차로 이전하는 인력들과 그 과정에 산업자본가로 변신한 엘리트들은 혜택을 입지만, 사회 전체의 궁극적인 이익은 바로 자본을 투하한 주주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금융산업의 이익은 가파르게 증가한다.

기존 질서에서 생산시설의 확대에 재투자하던 잉여자산을 후발국에 투자함으로서 자본효율이 발생하고, 인건비의 감축으로 생산단가가 낮아지며, 이익은 증가하고, 물가는 낮아진다. 그 결과 잉여자본과 유동성이 급증했다.

하지만 선진국과 후발국의 잉여 유동성은 출발은 같지만, 결과는 달랐다. 선발국은 실질 유동성의 과잉이지만, 후발국은 해외자본의 유입으로 인한 2차 유동성의 증가이다. 그래서 양측이 공히 유동성이 확대되고 자산가치가 증가하지만, 최종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 자산가격의 증가폭이 더 커지면 유동성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 것이다. 결국 자산가격의 상승이 유동성을 흡수하는 시점이 오면 발빠른 투자자들은 자본을 회수할 것이고, 개발국은 급격한 과잉투자 리스크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이다.


후발국은 과잉투자 리스크에 노출될 것

이것은 다시 후발국의 금융위기와 고용의 축소로 이어지고 사회불안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때문에 다들 이야기하는 중국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시대는 그리 쉽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전세계적 골디락스(경제가 높은 성장을 이루고 있더라도 추가상승이 없는 상태)는 결국 자산가격의 상승과 유동성의 증가가 접점을 찾는 지점, 또 개발국의 설비증가가 수요를 넘어서는 지점, 개발국의 생산성이 선진국의 어깨에 도달하는 순간 끝날 것이고, 이 다음은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는 파멸적인 시나리오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워런 버핏이 얘기한 ‘시속 40킬로에서 안전벨트를 푸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는 통찰적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을 예의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아직도 승자들은 전리품을 충분히 획득하지 못했고, 그 끝은 제법 남아있다. 하지만 미래의 패자들은 미래의 승자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아직 정확하게 모른다. 다만 그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순간, 우리가 ‘골디락스’라고 부르던 이 황금의 시기도 뒤를 돌아 본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으로 변해 역사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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