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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아낼 수 있기에 슬픈 - 색, 계
이동진(영화평론가) 2008년 01월호
국내에서 예상을 넘어서는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크게 성공하고 있는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육체의 형형한 실존에 대한 영화입니다.
생(生)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치열한 길항 작용에 대한 영화이고, 지루한 세월이 폭발하는 찰나에 맞서 힘겹게 싸움을 벌이는 영화이지요.
혹은 시간은 불균질하고 공간은 윤회합니다.
그리고 삶은 '지금 여기'와 '기타 등등'으로 나뉩니다.

이 영화는 1938년 홍콩에서 시작합니다.
대학 연극반에 가입한 왕치아즈(탕웨이)는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에 맞서 애국적 저항 활동을 벌이려는 광위민(왕리홍)에게 매료됩니다.
광위민이 친일파 핵심 인물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동조한 왕치아즈는 신분을 위장하고 미인계를 써서 이의 아내(조안첸)에게 접근하지요.
처음 본 순간부터 이와 왕치아즈는 서로에게 강렬히 이끌리지만, 급작스레 이가 상하이로 발령이 나 옮기는 바람에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보고 나면 모두가 이야기하는 '색, 계'의 베드신은 과연 강렬합니다.
이 영화의 섹스신 연출은 파격적인 동작을 섬세하게 연결하는 일종의 '안무'라는 점에서 이안 감독의 전작 '와호장룡'의 무술 장면 연출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지요.
두 남녀가 침대에서 몸으로 만나는 세 차례의 장면은 폭력적이고 과시적이지만, 이야기 흐름이나 인물의 심리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에로스는 침대 위에만 존재하진 않습니다.
왕치아즈가 커피를 마신 뒤 립스틱 자국을 잔에 남기거나 향수를 귀 밑에 슬쩍 뿌릴 때에도 이안은 카메라 뒤에서 큐피드의 화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셈이니까요.

이글거리는 내면의 불을 차갑고 강인한 외양 속에 감춘 연기의 품질도 좋지만, 이 영화의 양조위에게 정말로 감탄스러운 것은 바로 작품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탕웨이는 이 작품이 스크린 데뷔작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입체적이고 고혹적이구요.

상하이에서 다시 만난 이와 치아즈는 처음엔 의심과 증오를 밑바닥에 깔고 상대를 대하지만, 어느 순간 서로에게 격렬히 탐닉하면서 감정이 급변합니다.
결국 사랑에 빠진 이가 사랑에 빠진 치아즈에게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치아즈가 위로합니다. "많이 외로웠군요." 그러자 이가 조용히 내뱉습니다.
"그 덕에 살아 있는 거지."

외로움이란 삶이 처하는 특정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조건에 더 가깝지요.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만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할까요.
어쩌면 생명이란 고독을 견뎌내는 힘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사랑은 스스로의 고독을 발견하고 당황하게 되는 자가 찾아나서는 미로 같은 것일 겁니다.
사랑을 추동하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약한 속내인 것이지요.


이와 치아즈는 강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도 속을 드러내지 않고 어디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사내입니다.
치아즈는 매국노 암살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만큼 신념과 의지가 강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고독이란 삶의 조건을 묵묵히 받아들였던 이 두 강자는 상대를 만나고 스스로의 외로움을 인지하는 순간, 약자로 변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생(生)에 잠시 허락된 황홀한 혼란에 빠집니다.

이 영화는 제목에 등장하는 두 가지 요소인 '색'(色)과 '계'(戒)가 끝없이 맞물리면서 진행됩니다.
서로에게 빠져들기 전, 두 사람은 ‘계’의 경계 안에서 각각 위엄 있게 머뭅니다.
그러다 함께 '색'의 상태로 진입하면서 함께 마구 흔들립니다.
결국 한 사람은 '색'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 '계'의 세계로 복귀함으로써 삶을 이어가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의 경계 안에 머물기를 선택함으로써 삶을 끝냅니다.


'색'이란 단수인 '나'가 복수인 '우리'를 지향하는 상태입니다.
함께 있을 때의 충일감을 아교 삼아, 쓸쓸한 단수가 뜨거운 복수로 존재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교의 효력은 한시적이고, 삶은 결코 복수일 순 없습니다.
이 영화의 끝에서 계의 세계로 복귀한 이가 치아즈 없이도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는 이따금씩 깊은 밤에 문득 깨어 외로움에 몸부림칠 겁니다.

가끔씩 헛헛한 속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오래오래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러시아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영화 '어머니와 아들'에서 병으로 죽어가는 어머니는 홀로 남을 것을 예감하며 안타까워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단다. 그것은 불행도 재앙도 아니야. 그저 너무도 슬픈 일이지."

삶이 슬픈 것은 혼자 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삶은 결국 혼자 살아낼 수 있는 것이기에 슬프지요.


(이 글은 영화 전문 사이트 ‘이동진의 영화풍경'(news.naver.com/moviescene)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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