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생전에 남긴 많은 글들을 모은 문집에는 아내인 풍산 홍 씨에 대한 짤막한 글이 한 편 있다. 여기에는 그의 아내가 몇 명의 아이를 낳았는지 그리고 아이들 중 누가 세상을 떠났고 계속 성장했는지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하단 박스 참조). 풍산 홍 씨는 아들 6명, 딸 3명 총 9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이 가운데 아들 4명과 딸 2명이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그 결과 성년까지 생존한 자녀는 2남 1녀로 총 3명이었다.
다산의 문집에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평가하고 정책대안을 담은, 경제학자의 이목을 끌 만한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동안 관심을 갖고 연구해온 그런 종류의 글들을 제쳐두고 이런 소품(?)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이 글이 조선 후기 사회·경제 현실과 관련해서 한 사상가의 생각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엿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출산과 영유아 사망에 대한 정보다.
조선의 합계출산율 6.9명, 출산이나 출산후유증으로 사망
여느 나라들처럼 우리나라의 전근대 인구에 대한 정보는 매우 희귀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호구총수」 등 공식기록에는 인구집계자료가 실려 있지만, 신빙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이 자료만으로는 출산, 사망 등 중요한 정보들을 끄집어낼 수 없다. 최근 들어 족보를 통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만, 족보는 남성 중심 기록이라는 점 그리고 태어나서 일찍 죽은 아이들은 기록이 잘 돼 있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출산력 전체를 담고 있는 위와 같은 자료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얻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다. 만일 이러한 종류의 자료를 많이 모을 수 있다면 우리나라 전근대 사회의 인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풍산 홍 씨의 경우처럼 여성의 출산력을 상세히 담은 글이 흔한 것은 아니다. 우선 조선시대에 문집을 남기기 위해선 많은 돈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문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행장 자료는 기본적으로 상층 양반 가문이 대부분이다. 아울러 문집이 남아 있는 시기 역시 조선 후기로 제한이 되기 때문에 더 이전 시기에 대해선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여전히 중요한 정보를 도출해낼 여지는 있다.
경북대 박희진 박사는 오랜 기간 방대한 문집들을 일일이 검색해 양반가 여성의 행장 자료를 수집했다. 현재까지 2만여편의 기록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출산 정보가 비교적 잘 기록된 자료는 총 173편이었다. 주로 17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해서 종 모양으로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들은 조선 후기의 출산력 수준이 얼마나 됐는지를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필자는 박희진 박사의 도움으로 이 자료를 분석해 전근대 시기 우리나라의 인구 동학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들을 도출할 수 있었다.
우선 173명 중 60%가량의 여성은 폐경이 되기 전인 50세 이전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출산 중 사망하거나 출산후유증 때문에 세상을 떠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추정된다. 당대로서는 최고의 영양상태와 의료 지원을 받았을 상층 양반 가문에서도 출산 위험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성들 중에는 아이를 하나도 낳지 않았던 사람도 있는 반면 13명을 낳은 사람도 있었는데, 평균 자녀수는 5.1명이었다. 그런데 출산율 측정에 흔히 사용되는 지표는 합계출산율로, 이것은 여성이 가임기 전체 동안 낳은 아이의 수를 측정한 것이다. 이 자료로 보면 50세까지 생존한 여성이 평생에 걸쳐 낳은 아이수가 여기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값은 평균 6.9명이었다.
열악한 보건의료 조건이 다산다사 인구구조 낳아
이 수치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이 결과는 기존에 알려져 있는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출산율과 비교적 유사하다(<표> 참조). 하지만 흥미롭게도 서양의 전근대 사회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영국 인구사에 대한 토니 리글리와 로저 스코필드의 기념비적인 연구에 따르면, 영국 여성들은 우리나라보다 거의 10년이나 늦은 20세 중엽에 결혼을 했는데, 평생에 걸쳐 출산한 아이들의 숫자는 10명에 육박했으며, 다른 서유럽 국가들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른 나이에 사망해 성인이 돼 결혼을 하는 자녀는 2명이 약간 넘는 수준이었다. 이것은 흔히 전근대사회의 출산율로 알려진 수준, 즉 현재 인구의 재생산이 가능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통념과 일치하는 결과다.
이상의 연구결과는 우리나라 인구의 장기적 변화를 실증적으로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전근대사회가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지만 많은 수가 죽는 다산다사(多産多死) 사회였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조선 사회에서 최고 수준의 영양상태를 누릴 수 있었던 계층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확인된다는 점은 영양상태만큼이나 보건의료 조건이 다산다사의 인구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리나라의 인구구조에 큰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개항기 이후다. 이 시기가 되면 과거의 출산율 수준은 그대로 유지되는 반면, 영유아 사망률이 큰 폭으로 하락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인구변천이 발생한 데에는 종두법의 보급 등과 같은 보건의료의 확산과 생활수준의 향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여기에 대해선 향후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두 번째 변화는 지난 40여년 동안 진행되고 있는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이다. 인구총조사 등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보면 1950~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여성들이 전근대사회와 유사한 평균 6명의 자녀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급격하게 낮아지기 시작해 최근 들어선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출산율이 낮은 국가가 됐다.
출산은 기본적으로 개인적 선택의 문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는다면,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고민을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출산율이 왜 이렇게 빠르게 하락하는지 그리고 이것을 완화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해법은 쉽게 찾아지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거대한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재의 상황에만 너무 몰두하기보다는 다양한 각도에서 폭넓은 고찰을 시도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조선 후기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출산의 장기적 추이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실질적 이유를 굳이 들어야 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풍산 홍 씨의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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