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역사가들은 2018년을 글로벌 무역전쟁의 원년(元年)으로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드리워졌던 무역전쟁의 전운은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전 세계를 덮쳤다. “미국이 1천억달러의 손해를 보고 있는 상대국이 만약 머리를 굴린다면, 그 나라와는 더 이상 교역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이긴다. 쉽다!” 3월 2일(이하 현지 시간)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트위터 메시지는 미국에 손해를 안기는 나라와는 교역을 끊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었다. “무역전쟁은 좋은 것이며, 이기기도 쉽다”며 자신감도 내비쳤다.
한미 FTA, 세이프가드, 철강 관세···압박 수위 높이는 미국 한국은 불행히도 트럼프 대통령의 통상압박을 정면으로 받아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미 상무부 집계 기준으로 2017년 미국의 무역 상대국 중 10번째로 큰 228억8,740만달러(약 2조5천억원) 적자를 기록한 나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는 ‘재앙’을 악용해 미국시장에 수많은 자동차를 팔고 한국시장은 비관세 장벽으로 가로막아 미국산 자동차 판매를 방해하는 나라.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부터 한국을 콕 찍어 불공정한 무역의 대표 국가로 지목해왔다. 그래서일까. “일부 국가는 이른바 미국의 동맹국이지만 무역에서는 동맹이 아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비난에 한국이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한 통상압박 수위를 점차 높여왔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요구로 한미 FTA 개정협상이 시작됐다. 올 1월에는 사실상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의 한국산 세탁기를 겨냥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가 발동됐다. 한국산 제품 등 모든 수입품에 ‘상호호혜세(Reciprocal Tax)’를 부과하겠다는 말도 나왔다. 한국은 정공법으로 맞섰다. 팩트(사실관계)와 논리를 내세워 대응했다. 한국의 대(對)미국 무역수지 흑자가 지난해에만 23.2% 줄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한국 기업이 만든 세탁기는 고가 제품이라 미국산 제품과 카테고리(범주)가 겹치지 않고 오히려 미국 소비자들의 선택 폭을 늘리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한국 대기업들은 미국에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창출했다는 점도 내세웠다. 먹히지 않았다. 그리고 철강 제품에 25%, 알루미늄 제품에 10%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 예고로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는 절정에 도달했다. 한국, 중국 등 12개 국가에만 53% 선별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이 선택되지 않은 점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다행히 3월 22일 한국은 관세부과 ‘잠정 유예’ 국가 명단에 올라갔고, 양국의 지속적 협상을 거쳐 철강 관세 부과 면제 조치를 받아냈다. 다만 그 조건으로 관세 면제 물량을 2015~2017년 평균 수출량의 70%인 268만톤으로 제한하는 쿼터(수입 할당)를 수용하면서 수출량 감소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러스트벨트 등 美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배경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초강력 보호무역주의 정책의 배경을 미국 내부의 정치적 상황에서 찾는다. 자신의 지지기반인 ‘러스트벨트(쇠락한 공업지대)’를 의식한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3월 8일 무역확장법 232조 서명식에서 철강 및 알루미늄 산업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마치 자신을 옹호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이어 러스트벨트 대표지역 중 하나이자 연방 하원의원 보궐선거가 예정된 펜실베이니아주를 찾아 “여러분의 철강, 알루미늄이 돌아오고 있다”고 선언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비판은 곳곳에서 나왔다. 「맨큐의 경제학」 저자로 널리 알려진 주류 경제학자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자유무역의 혜택이 명백한데도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무역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29년 이후 전 세계 경제를 붕괴시켰던 대공황의 재림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국이 스무트 홀리 관세법을 시행한 이후 전 세계적인 보복관세로 대공황을 불러왔다”고 지적했으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다른 제품에도 관세를 부과하려고 할 것”이라며 대공황 당시에 발생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물론 비판만 있는 건 아니다. 미 민주당 버니 샌더스의 무역 정책 자문을 맡았던 앨런 토넬슨은 트럼프 대통령의 선택이 “일자리와 미국경제에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인과 공업지역 근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당장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되고 해외 기업들까지 미국에 투자하게 만드는 트럼프의 보호무역정책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건 무역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은 철강 관세를 면제해주지 않으면 미국산 위스키, 농산품, 청바지 등을 겨냥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산 자동차에 관세를 검토하겠다며 맞받아치고 나섰다. 미국은 무역전쟁의 사실상 타깃인 중국을 향해서도 연일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3월 15일에는 중국산 알루미늄 포일에 최고 188%의 반덤핑 상계 관세 폭탄을 부과하기로 했다. 중국은 “반드시 보복하겠다”며 약 30억달러 규모의 보복관세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또한 미국 국채 최대 보유국인 중국이 미국 국채를 내다 팔 낌새를 보이면서 글로벌 채권시장에도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정부 관계자는 “무역전쟁 대신 통상마찰로 표현해달라”며 미국과 대립을 피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등이 총출동해 한국의 철강 관세 면제를 받아내기 위해 애썼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서는 무역전쟁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실리는 챙기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정부와 민간 모두의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