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한국의 국제적 역할과 위상을 강화하고 지속적 경제번영과 외교공간의 확대를 위한 외교다변화를 핵심 외교정책으로 추진 중이다. 외교다변화는 외교적 협력의 지리적 범위, 협력 의제 및 협력 파트너의 다변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유라시아 지역 핵심 파트너와의 협력 강화를 위한 신북방정책 및 아세안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신남방정책이 외교다변화 전략의 핵심이다.
저성장 한국경제의 새로운 활로 찾는 대외경제정책이자 선제적 외교전략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1월 동남아 순방에서 ‘한·아세안 미래 공동체 구상’을 발표하고 신남방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신남방정책은 ‘사람, 상생번영, 평화’의 3대 비전을 중심으로 ‘사람 중심의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 형성을 핵심 비전으로 제시했다. 아세안을 핵심 협력 파트너로 상정하고 있는 한국의 새로운 외교전략인 신남방정책의 성격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신남방정책은 대외경제관계의 다변화를 추구하는 한국의 새로운 대외경제정책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한국의 대외교역 구조는 중국, 미국, 일본, EU 등 주요 경제권에 편중돼 있어 중국의 ‘사드보복’이나 미국의 ‘한미 FTA 재협상 요구’와 같은 외생적인 압력이나 충격에 취약한 구조다. 이러한 대외경제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정국에 편중돼 있는 한국의 대외경제적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보다 역동적인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신남방정책은 세계경제의 엔진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세안과의 상생협력 확대를 통해 저성장 기조에 빠진 한국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신대외경제정책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신남방정책은 기존 4강 중심의 외교를 넘어서 아세안과 같은 지역 내 파트너 국가들을 향한 새로운 외교적 재균형정책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미·중·일·러 4강, 특히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전개돼온 한국 외교에서 아세안은 부차적 대상으로 머물러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아세안과 같은 신남방 국가들은 외교적·경제적으로 한국의 국가이익 증진에 필수불가결한 협력 파트너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아세안과의 양자외교 관계를 4강 수준으로 획기적으로 격상할 것을 천명하고, 이들 신남방 국가들과 양자 차원에서 외교적 유대관계 형성과 긴밀한 파트너십 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셋째, 신남방정책은 아시아 역내 협력과 통합을 위한 한국의 새로운 지역협력정책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중국은 일대일로 구상의 이행을 통해 자국이 중심이 되는 경제권 구축 및 역내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고, 미국은 새로운 인도·태평양 전략을 추진하는 등 아태지역에서 미중 강대국 간 대립 구도가 격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국과 같은 역내 중견국에는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미중 간 대립 구도에서 원하지 않는 외교적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남방정책은 이러한 강대국 주도의 지역질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교적 위험을 줄이고 규범과 제도에 기반한 다자적 질서 형성을 위한 한국의 새로운 지역협력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아세안과의 전략적 협력을 통해 우리 외교의 활동공간과 자율성을 확대하기 위한 선제적 외교전략이다.
지난 2년여 동안 적극적으로 추진돼온 신남방정책은 그동안 적잖은 가시적 성과를 낳았다. 첫째, 정부가 신남방정책 추진을 위한 체계적인 조직기반을 구축하고 범정부 차원의 정책추진을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신남방정책 추진 차원에서 외교부에 아세안과의 협력을 전담하는 아세안국(局)을 신설하고, 주아세안대표부를 격상해 아세안 회원국 주재 10개 외교공관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겼다는 점은 신남방정책 추진의 제도적 기반구축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특히 아세안이라는 특정 지역만을 전담하는 국이 외교부에 설치됐다는 사실은 우리 외교에서 아세안이 얼마나 중요해졌는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축 위한 공조 강화 등이 성과
둘째,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외교정책에서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해 추진하면서 아세안과 양자 차원의 외교적 협력, 특히 정상 간 교류가 강화되고 있는 점도 매우 긍정적인 성과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까지 아세안 10개국 순방을 통해 이들 신남방 국가와의 양자관계 공고화를 천명한 바 있는데, 이미 올해 9월에 태국, 미얀마, 라오스를 공식 방문함으로써 임기 내 아세안 10개국 순방 공약을 조기에 달성했다. 신남방정책 추진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통령의 아세안 방문은 아세안 각국과의 양자외교 관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강력한 정치적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셋째, 신남방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이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구축을 위한 한국과 아세안과의 공조가 강화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인 성과다. 이미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제1, 2차 북미회담의 장소를 제공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 중요한 기여를 한 바 있다. 특히 향후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아세안 국가들이 북한의 경제 개혁·개방 및 국제사회와의 교류, 즉 북한의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국과 아세안이 적극적으로 공조하고 있다는 점도 신남방정책의 긍정적 성과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외교안보적 측면에서 신남방정책을 통해 아세안과 전략적 공조를 위한 외교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성과라 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중 간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는 지역 역학 구도에서 한국 외교의 새로운 헤징(hedging) 전략으로서 신남방정책의 외교전략적 가치는 매우 크다. 미중 양 강대국의 전략적 대립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포용적 지역질서 형성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아세안과의 전략적 공조는 우리 외교의 활로를 모색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오는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 부산에서 한·아세안 대화관계 수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와 제1차 한·메콩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이번 특별정상회의는 한·아세안 관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왜냐하면 정상 간 합의를 통해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외교적 협력의 강력한 정치적 추진력을 제공함으로써 한·아세안 관계의 심화를 위한 중요한 기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11월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에서 정상들 간 합의를 통해 다양한 실질적인 성과사업(deliverables)들이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이번 특별정상회의는 향후 한·아세안 협력의 정치적 방향성에 대한 합의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향후 한·아세안 관계의 도약을 위한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