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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미중 전략 경쟁 속 WTO체제 회복 쉽지 않을 듯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2020년 12월호


다자무역체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다자무역체제와 동의어인 WTO의 핵심기능인 분쟁해결 절차는 식물화된 상태다. 2019년 말 3인으로 구성돼야 하는 상소기구의 상임위원 숫자가 1명으로 줄었다. 그간 미국의 반대로 신임 상고위원을 선출하지 못한 누적의 역사는 끝내 파국을 불러왔다. WTO 위기의 징후는 이미 오래전에 시작됐다. 2001년 출범시킨 다자간 무역협상인 도하라운드는 아직도 협상 중이다. 2015년 12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WTO 통상장관회의에서 마이클 프로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도하라운드의 공식 폐기를 주장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이야기다. 1947년부터 세계무역 질서를 관할해온 GATT 및 WTO 다자무역체제의 설계자이자 최대주주 격인 미국이 판을 깨려 하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WTO체제의 붕괴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서 가속화됐다. 안보를 이유로 철강수입제한 조치를 취하는 트럼프의 일방주의에 규범 중심 다자체제가 설 곳은 없었다. 미국은 세계 최대 무역국가로 부상한 중국이 개도국 대우를 누린다는 것은 불공정의 극치라며 불만을 쏟아냈다.

WTO체제, 국영기업·보조금 앞세운 중국식 경제체제 문제 다루기엔  역부족
다자무역체제의 위기가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이유는 세계 최대 경제인 미국과 최대 무역국인 중국이 본격적인 전략 경쟁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WTO 가입 후 다자무역체제의 최대 수혜자로 떠오른 중국은 자신을 WTO체제에 끌어들인 미국 등 서구의 기대와는 달리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중국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은 “시장 줄 테니 기술 주라”는 중국의 거래 법칙에 새롭게 눈뜨고 있다. 시장경제를 상정한 규범 중심 다자무역체제는 이런 중국식 경제가 던지는 구조적·행태적 문제를 취급하기엔 역부족이다. 트럼프 행정부 첫해, 의회에 제출하는 연례보고서의 결론은 “미국이 중국을 WTO에 가입시킨 것은 실수였다”는 것이다.
WTO체제는 중국식 경제체제가 야기하는 문제를 다루기엔 역부족이다. 그 전선은 두 군데다. 하나는 전통적 경제 분야에서 국영기업과 보조금을 앞세운 중국식 경제가 야기하는 문제이고, 나머지 하나는 디지털경제에서의 중국식 기술굴기 문제다. 자동차, 철강 등 전통적인 경제에서 미국은 중국 방식의 경제체제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 덩치 큰 국영기업을 내세워 자국시장을 독점하고 압도적인 공급력을 무기로 세계시장에서 시장점유율을 높여가는 중국과의 경쟁을 주주와 시장의 압박에 상시 노출돼 있는 시장경제체제는 감당하기 쉽지 않다. WTO 덤핑 및 보조금 규정은 중국식 비시장경제 문제를 다루기에 최적화돼 있지 않다.
디지털 분야에서 중국의 기술굴기 문제는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5G,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안면인식 기술 분야에서 중국은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문제는 중국의 이런 기술이 중국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첨단기술이 정치와 연계돼 발생하는 문제를 WTO에서 다룰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바이든은 미국을 다시 다자무역체제로 복귀시킬 것인가? 바이든이 ‘다시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을 표방하면서 다자주의의 복원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 다자주의는 과거 WTO체제로의 복귀는 아니다. 바이든의 다자주의는 트럼프의 일방주의에 대한 반대를 의미할 뿐이다. 트럼프의 대응방식은 미국의 힘에 의존하는 일방주의였다. 한국, 일본, 독일 등 동맹국들을 미국에 무역수지 적자를 안겨주는 나쁜 국가로 취급하는 트럼프식 일방주의의 한계는 분명했다. 바이든 통상정책의 출발점은 트럼프가 무시한 동맹에서 시작된다. 바이든은 인권, 공정경쟁, 환경, 노동 등을 앞세워 동맹국들과 연계를 추구하면서 중국을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 민주당이 반대했던 TPP, 회복은 바이든의 정치적 협상력에 달려
바이든이 손에 쥐고 있는 카드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TPP는 미국이 주도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12개 국가의 자유무역협정이다. “중국이 21세기 통상규범을 쓰게 할 수 없다”는 전략적 구상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했던 TPP는 2015년 타결됐지만, 2016년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가 집권 첫날 탈퇴를 공식화하면서 미국 없는 나머지 11개 국가만의 자유무역협정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로 남았다. 바이든은 다시 미국을 TPP에 가입시킬 것인가? 오바마가 TPP를 추진했지만 그의 당인 민주당은 부정적이었다. 바이든은 가치 중심 통상전략의 하나로 TPP를 활용할 수 있지만, 분열적인 국내 정치를 극복해야 한다. 민주당은 TPP 협상 출범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반대당이던 공화당의 협조를 받아서 가까스로 TPP 협상을 추진할 수 있었다. 미국 내 정치 지형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의 부상을 저지할 수 있는 전략적 카드로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정치권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바이든의 협상력이 주목된다.
다자체제의 위기는 통상대국 한국의 위기와 동의어다. 규범 중심 자유무역체제가 붕괴된 자리에 들어선 힘에 의존하는 일방주의, 관리무역체제는 세계시장과 연결돼야 하는 한국엔 거센 역풍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식 일방주의를 답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위안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다자체제로의 복원이 아닌 미중 전략 경쟁시대 미국에 유리한 분야를 중심으로 동맹을 형성해 중국에 대적한다는 것은 중국시장과의 연계도가 높은 한국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
바이든의 가치 중시 동맹연결 통상외교는 한국·일본과 연계해 중국의 국가 주도 비시장경제체제와의 불공정경쟁을 저지하려 할 것이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으로 동맹을 압박하고 국가안보를 이유로 동맹과의 무역을 제한했던 트럼프의 시대는 가고 원칙과 가치를 내세우는 바이든의 시대가 왔다. 한국은 어떤 원칙과 가치를 붙들고 바이든 시대의 바람을 기회로 활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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