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이라는 도전적 과제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전 사회적인 구조전환과 제도적 대응이 필요하다. 여기에 세계 5위권의 제조업 강국으로 부상한 한국으로서는 글로벌 리더로서 지속 성장과 산업경쟁력 강화라는 합목적성을 충족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그린 뉴딜 추진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혁신역량을 높이는 것을 전제하는 것도 이러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탄소중립은 개별 기업·산업 차원에서 감당 어려워
범국가적 경제·산업 정책으로 접근해야
다양한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는 한국은 전후방 연관효과가 높은 구조적 특성상 특정 산업 혹은 공정의 변화만으로는 탄소중립과 지속 성장을 동시에 실현하기 어렵다. 따라서 탄소중립으로의 여정은 환경보호 관점을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경제·산업 정책 관점에서 면밀하게 준비되고 추진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에너지·온실가스·환경 부하가 높은 주요 산업이 혁신공정으로 전환하고 생산구조를 고도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비중이 높은 대표적 산업으로는 철강, 화학, 반도체, 전기전자, 기계 산업이 있지만, 이 산업들은 세계적인 제품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설비 및 공정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동시에 전체 제조업에 소재·부품·장비를 공급하는 기간산업이므로 포기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산업별·공정별 특성을 반영하되 새로운 제조업 패러다임에 부합하는 공정과 제품구조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정부가 중장기적인 비전을 가진 혁신 R&D를 계획하고 일관성 있게 지원해야 한다.
탄소중립을 위한 산업의 전환은 개별 기업 혹은 산업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범국가적인 지원을 통해 기술혁신을 위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기업이 능동적으로 탐색·개선하면서 새로운 혁신역량을 높여나가야 한다. 이와 관련해 유럽은 국가별 R&D뿐만 아니라 EU 공동으로 장기·거대 프로그램을 통해 산업계의 전환을 지원하고 있다. 수소환원제철, P2X(Power–to–X)와 같은 혁신공정의 상용화와 시범사업을 정부가 선제적으로 추진하면서 연관된 기계 및 엔지니어링 업체를 참여시켜 혁신공정과 설비의 공급역량을 성장동력화하는 방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째, 저탄소 기술의 경쟁력 확보와 신뢰성 검증을 위해 이종 기술·산업 간 연계를 통한 기술 개발과 적용을 촉진해야 한다. 핵심 가능 기술의 제조공정에 대한 시범프로젝트를 통해 기술의 효과성을 검증하고, 이행에 필요한 기술과 역량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유망한 핵심 가능 기술로는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스마트에너지 기술 등이 있는데, 이는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이 연계성을 갖고 추진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D.N.A.(Data, Network, AI), 산업지능화 기반의 스마트공장, 스마트그린 산업단지 및 클러스터 조성 역시 집중적인 전환을 도모하는 효과가 예상된다.
셋째, 개별 산업 혹은 공정의 온실가스 저감도 필요하지만 순환경제 이행을 위한 제품의 전 주기적인 접근이 보다 중요하다. 제품 생산 과정에 대한 온실가스 배출 부하를 줄이기 위해 산업 자체를 위축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업과 소비자 모두 저탄소제품을 발굴하고 생산비중을 높여나갈 수 있도록 정책이 설계돼야 한다. 환경표지 제품, 우수재활용 제품, 저탄소 인증제품 등 녹색제품의 생산과 소비 촉진을 위한 인증을 확대하고, 관련 제품의 가격상승을 사회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아울러 재활용 기술을 고도화하고 설비를 정비해 저비용화를 추구해야 한다. 재활용제품 이용 확대를 위해 재활용성이 높은 고기능 소재나 재활용 기술 개발, 설비 고도화, 폐기물 회수경로 최적화와 함께 재활용 제품의 시장 확대를 도모하고 소각시설 배출가스의 활용을 위한 실증사업도 확대해야 한다. 생산과 소비뿐만 아니라 제품의 폐기와 재사용까지 모두 포함하는 전 주기적인 관점에서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 사회적인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산업의 기여를 높이도록 해야 한다. 이는 곧 제품의 디자인·생산 단계부터 재사용·재활용을 고려해 생산·소비·폐기 전 과정에서 환경 부하를 최소화하는 순환경제 플랫폼의 활성화를 의미한다. 생활폐기물을 재자원화하기 위한 기업의 노력이 사회로부터 배척당하지 않고 높게 평가돼야 하며, 정부, 산업계, 시민단체 등 이해관계자의 적극적 참여와 아울러 사회적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그린인프라 공급과 적정 가격 보장 포함한 로드맵 선행 필요
탄소중립이 효과적으로 추진되기 위해서는 정책 간 연계를 통해 시너지가 창출돼야 한다. 우선적으로 전력, 수소 등 그린인프라의 충분한 공급과 적정 가격수준이 보장될 수 있는 로드맵 마련이 필요하다. 여기에 폐열·폐기물의 회수·이용 가능 여부,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기술 활용 등에 대해 추상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실현 가능한 시나리오를 수립해 추진하면서 신뢰를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들도 투자하고 소비자들도 구매패턴을 정착시킬 수 있으며, 사회시스템이 안정화될 수 있다.
둘째, 금융·조세 지원을 구체화해야 한다. 산업계의 온실가스 감축 기술 투자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정책금융을 활성화하고 적극적으로 세제 지원을 해야 한다. 산업은행과 같은 정책금융·기술보증 기관이 적극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기술·제품·시설 투자를 지원해 기업의 투자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금융기관의 탄소보험상품 개발을 장려해 손실 회피를 지원하고, 탄소펀드 조성을 확대해 탄소 저감사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며, 신재생에너지 설비, 환경오염 저감 설비, 온실가스 감축 설비에 대한 투자세액을 공제해 친환경시설 투자를 장려해야 한다. 또한 탈탄소사회 이행과 친환경·저탄소 산업 육성을 위해 녹색금융상품을 개발하고, 녹색금융상품의 발행자·수요자를 위한 정교한 녹색분류체계를 제시해 지속 가능 금융의 기준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직접 투·융자, 펀드 조성, 녹색채권 발행 등으로 탄소중립 전환 이행 초기의 위험을 해소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녹색 전환과 지속 성장이 공존하는 산업발전 경로와 체제의 전환을 모색하기 위한 ‘제조업 르네상스 2.0’이 수립돼야 한다. 산업별 특성을 고려하는 발전경로를 재설정하고, 산업 내 제품구조의 재편과 아울러 산업 간 투입산출 구조의 변화를 목표로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탄소중립을 위해 단기에도 산업, 투자, 통상, R&D, 환경 정책 간 연계성과 통합성을 갖도록 해야 한다. 대전환을 위한 집중적·전략적 재정투자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경기부양과 고용창출을,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