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2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초저출산과 급속한 인구고령화가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현상들은 사회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들을 던지고 있다.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해 한국사회는 사회적 돌봄 확대 및 돌봄비용 분담, 노인소득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 많은 영역에서 사회보장제도의 확대를 이뤄왔다. 그러나 많은 사회구성원이 미래에 다가올 삶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삶의 질’이 빠진 물질적 생활수준의 향상이 우선되고 있기 때문이다.
능력 중심의 연령통합적 기준에 기초해야
2021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은 삶의 질 향상을 주요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지향하는 삶의 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 개념 제시는 없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발전’ 그 자체를 삶의 질 향상으로 간주해 왔다. 물질적 생활수준·생활환경이 획기적으로 향상됐지만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다. 사람 만나기와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노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비율도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높아진 생활수준과 행복한 느낌이 일치할 때 삶의 질 수준이 높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삶의 질 수준이 낮은 사회다.
게다가 소득이 높아지고 사회보장제도가 확대돼도, 가족관계는 여전히 성차별적이다. 부계 혈통주의의 법적 토대가 확고히 남아 있다. 독박육아와 경력단절은 남성은 모르는, 여성만의 경험이다. 여성은 젠더폭력의 불안에 떨고 남성은 가부장제 사회가 떠맡기는 가장 역할이 부담스럽다. 노동시장은 많은 사람에게 일·생활 균형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까지 해서 일·가정 양립을 계획하기는 어렵다. ‘인생 100세 시대’는 이른바 취업활동인구 집단에서 벗어난 이후 불안해지는 기간만 늘어남을 의미한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현재 60% 수준이 채 안 되는 여성 고용률이 80% 수준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현재 취업활동인구 100명이 40명의 유소년·노인 인구를 부양한다는 인구부양 부담 개념은 여성 취업활동 확대의 유동성을 반영하지 않은 개념이다. 여성 취업 확대는 당연히 노동시장의 성평등화를 전제로 한다. 직장에서의 젠더폭력, 성별 임금격차, 여성 경력단절, 유리천장 등이 빠르게 사라져야 한다. 노동시장이 성평등한 변화를 하지 않은 채 ‘먹고 살기 위한’ 여성 취업만 늘어난다면, 서유럽사회가 경험한 여성 고용률 60% 돌파 이후 출산율 증가 효과는 한국사회에서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여성 취업이 확대될수록 출산율이 더 낮아지는 ‘이행의 늪’에 빠져들 것이다.
인구부양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노인연령 상향 조정이다. 한국은 이미 65세 이상 노인 고용률이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인 국가다. 현 세대 노인의 빈곤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65세 노인이 돼가는 베이비붐 세대의 상황은 다르다. 계속 일할 능력과 체력 그리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다. 「노인복지법」에서도 노인을 ‘65세 이상인 자’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노인연령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국가의 모든 사업과 프로그램이 ‘청소년기, 청년기, 중장년기, 노년기’ 등 연령분절적 기준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노인연령 상향 조정과 더불어 개인 능력 중심의 연령통합적 기준에 기초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지역 살리기를 하려면
결혼·출산 장려 틀에서 벗어나야
부계 혈통주의에 기초한 가족관계 변화는 향후 한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서 중요한 축이 될 것이다. 개인이 원하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고, 그렇게 구성한 가족이 어떤 형태든 차별받지 않는 열린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게 제도화돼야 한다. 법률혼 중심의 가족 개념을 고수하고 있는 「민법」과 「건강가정기본법」이 개정돼야 한다. ‘생활동반자법안’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다양한 가족의 삶이 존중받으며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변화가 조속히 일어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구구조 변화가 한국사회에 요구하는 과제는 지역상생의 실현이다. 우선,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에 따른 비수도권 지역소멸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 수도권 내에서도 인구감소에 따른 지역인프라 붕괴가 삶의 질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구도심과 신도심, 신축 거주 지역과 오래된 주거 지역 간 격차가 거주 지역에 따른 사람 차별로 나타나기도 한다.
청년이든 베이비붐 세대든 수도권에 집중 거주하고 있는 인구집단의 비수도권으로의 이주가 더 이상 미래의 과제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비수도권 지역의 초등학교 폐교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대해서는 안 된다. 비수도권 지자체 차원의 지역소멸 위기 대응 노력에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따라야 한다. 이미 많은 지자체에서 ‘지역 살리기’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와 광역시, 도 그리고 기초지자체 간 거버넌스의 실질적 작동이 매우 중요하다. 결혼장려, 출산장려의 틀에서 벗어나 지자체가 지속 가능한 지역 살리기를 할 수 있는 협력과 지원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급속한 경제성장이 행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초저출산, 심각한 노인빈곤과 자살로 귀결된 현재를 구체제의 시대로 규정한다. 구체제는 성차별적, 연령차별적, 지역차별적 체제다.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노후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체제다. 성평등적, 연령통합적, 지역상생적인 ‘신체제’를 가능케 하는 사회제도 개혁을 하루빨리 시작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