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대한민국 무역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무역액이 1조2,596억 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를 달성하며 우리나라는 세계 8위의 무역 강국으로 도약했다. 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시작된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폭등, 글로벌 공급망 차질과 보호무역주의 확산 속에서 이뤄낸 성과다. 중소기업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 역대 최대 수출액인 1,171억 달러라는 신기록을 달성하며 큰 역할을 했다.
지난 2월 1일에 발효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은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 기업들의 수출 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수출이 중국(25.3%), 미국(14.9%) 등 일부 국가에 편중돼 무역분쟁에 취약한 구조인데 세계 최대 경제공동체에 편입됨으로써 무역 저변을 확대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中企 77.3%, RCEP 발효 시 무역장벽 완화에 따른 수출 증가 기대
RCEP은 아세안 10개국(브루나이·캄보디아·인도네시아·라오스·말레이시아·미얀마·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과 한국, 중국, 호주, 뉴질랜드, 일본 5개국이 참여하는 거대 FTA다. 역내 인구는 22억6천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30%에 달하고, 무역 규모도 연간 5조4천억 달러로 전 세계 교역의 29%를 차지한다. 그간 한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았던 일본과도 신규로 FTA를 체결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RCEP 발효 시 역내 국가의 총무역액은 420억 달러 정도 늘어나고, 우리나라의 역내 무역액은 약 70억 달러 증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는 일본(200억 달러)이나 중국(110억 달러)의 증가분에는 못 미치지만, 우리나라는 RCEP 가입 15개국 중 3위 수혜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소기업들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 결과, 중소기업의 85.3%가 RCEP 발효 시 경영상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답했고, 77.3%가 무역장벽 완화에 따른 수출 증가를 기대했다. 우리나라 총수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RCEP 회원국이 시장을 추가로 개방했고, 이로 인해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 여건이 개선된 만큼 RCEP 협정을 잘 이해하고 보다 전략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원산지 규정 혜택을 받을 수 있다. RCEP 협정문 제3.4조에 따르면 회원국 간 원산지 누적 기준을 적용받아 다른 RCEP 참여국에서 생산된 중간재를 사용해 최종 제품을 만들 경우에도 자국산으로 인정돼 역내 공급망 강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간 한·베트남 FTA에서는 국내 기업이 중국산 원재료를 사용하면 한국산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RCEP을 활용하면 중국산 원재료를 활용하더라도 한국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지금까지는 여러 국가와 각각 FTA를 체결할 경우 다양한 원산지 규정을 파악하는 데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입돼 기업들이 불편을 겪어왔다. 하지만 RCEP에서는 국가별로 상이했던 원산지 기준을 통합함으로써 동시다발적 FTA로 발생할 수 있는 비효율성, 이른바 ‘스파게티볼 효과’를 최소화했다.
인증수출자의 원산지 증명절차는 더욱 간소화된다. 원산지 자율증명 방식이 적용되면 원산지 인증 시 첨부서류 제출이 간소화되는 등 편의성이 높아진다. 그간 FTA를 활용하지 못하던 중소기업도 원산지 증명에 대한 충분한 학습과 전략 수립을 통해 적극적인 활용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됐다.
둘째, 관세 철폐 등 무역장벽 완화로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게 됐다. RCEP은 기존 한·아세안 FTA의 관세 철폐 수준을 품목 수 기준 79.1~89.4%에서 91.9~94.5%로 높였다.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섬유 등 우리나라 주요 수출품목에 대한 관세도 추가로 철폐했다. 물론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우리나라의 세 번째 교역상대국이자, 상위 5대 교역국 중 유일하게 무역수지 적자를 보고 있는 일본과의 거래다. 그러나 다행히 이번 협정에서는 일본에 대한 개방 수준을 낮추고, 민감품목에 대한 관세 철폐도 제한적 수준에서 장기적으로 이뤄지도록 함으로써 중소기업이 시간적 여유를 두고 기술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기업들이 제도 활용에 어려움 겪지 않도록 우수 활용 사례 발굴 등 정책적 지원 필요
셋째, 역내 경합산업의 경우 국가 간 세율차이를 이용한 수출 확대가 가능하다. 국가별 양허세율이 다른 품목에 대해 국내 기업들이 가격 측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의 경우 합성필라멘트사 직물 수입 시 한국산은 0%, 중국산에는 9.1%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고, 차량용 안전유리에도 한국산은 0%, 중국산에는 3.5%의 관세를 부과한다. 이러한 점을 활용하면 일본시장에서 중국과 경합하는 우리 제품이 상대적인 가격경쟁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은 지식재산권에 대한 보호규정 강화다. RCEP에는 총 83개의 지식재산권 조항이 구체적으로 규정돼 있다. 그동안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웠던 K팝 등 한류 콘텐츠에 대한 보호도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중국과 아세안 지역에서의 지식재산권 분쟁이 줄고, 그간 문제가 됐던 역내국의 상표도용, 무분별한 한류 편승 등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RCEP 발효는 우리 중소기업에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다. 거대 시장에 편입된 만큼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고, 코로나19 이후 변화하는 통상환경 속 기업 전략의 빠른 변화도 요구된다. 선진국과 개도국이 모두 포함된 협정인 만큼 기술과 가격경쟁력 제고를 위한 개별 기업 스스로의 자구노력도 중요하다. 정부도 중소기업이 RCEP을 적절히 활용해 긍정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특히 중소기업들이 제도 활용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우수 활용 사례를 발굴하고 지속적으로 홍보하는 등 정책적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
세계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는 우리 중소기업 수출전사들이 RCEP을 발판 삼아 넓어진 경제영토를 마음껏 누비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