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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고전하는 러시아, 패착 요인은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2022년 05월호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1세기 초 세계 체제를 뒤흔든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국가 목표를 위해 주권국가를 침공한 것은 국제 규범과 질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 전쟁의 원인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의 동진(東進)으로 자국 국경이 위협받아 전쟁에 나섰다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나토 동진이 문제라면 나토나 이를 이끄는 미국과 협상해야지, 아직 회원국도 아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러, 나토를 서구 가치관의 확장 도구로 여겨
우크라이나 파괴해 본보기 삼으려 했을 가능성 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두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고 주장하며,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만든 국가라는 논리를 펴왔다. 하지만 이는 현대 우크라이나가 1991년 러시아·벨라루스와 함께 소련 해체를 스스로 결정하면서 주권국가로 독립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발언일 뿐이다.  

주목할 점은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이 2004년 11월~ 2005년 12월과 2013년 11월~2014년 2월 두 차례에 걸친 국민 혁명으로 더욱 분명해졌다는 사실이다. 친러파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했지만, 국민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면서 당선 무효가 선언됐다. ‘오렌지 혁명’이다. 재투표에서 3대 대통령에 당선한 친서구파 빅토르 유셴코는 러시아 입김에서 벗어나고 독립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EU와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2010년 집권에 성공한 야누코비치가 반서구·친러 정책을 펴면서 2013년 EU와의 경제협력과 EU 및 나토 가입 진행을 백지화하자, 우크라이나 국민은 수도 키이우의 마이단(독립)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장기간 벌였다. 바로 ‘유로마이단 혁명’이다. 100여 명이 숨지는 유혈사태까지 벌인 끝에 야누코비치는 2014년에 탄핵당하고 러시아로 망명했다. 

푸틴은 바로 그해에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우크라이나 동남부 돈바스 지역의 동쪽 절반에 친러 분리주의 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당시 우크라이나도 나토도 러시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어 우크라이나 국민이 대통령으로 선출한 기업가 출신의 페트로 포로셴코는 국민의 뜻에 맞춰 친EU·친나토 정책을 추진했다. 의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헌법에 ‘EU와 나토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국가전략’이라는 문구를 삽입했다. 오렌지 혁명과 유로마이단 혁명을 치른 우크라이나 국민은 서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우크라이나가 갈 길임을 분명히 못 박았다. 2019년 대통령이 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런 헌법을 준수해 왔다. 

푸틴은 왜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지를 군사력으로 꺾으려고 했을까. 첫째, 2000년 대통령에 오른 이래 장기 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등 권위주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틴은 총리 시절인 1999년 8월에 시작한 제2차 체첸 전쟁을 2000년 5월 승리로 마감하면서 정치적 인기가 크게 올라갔다. 2008년에는 나토 가입을 추진하던 캅카스 국가(조지아·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중 하나인 조지아를 침공하면서도 같은 효과를 누렸다. 권위주의 통치가 힘을 앞세운 민족주의와 궤를 함께한 셈이다.  

둘째, 지정학적인 완충설로 설명하기도 한다. 거대 러시아는 완충지대를 확보하지 못할 경우, 19세기 나폴레옹의 프랑스나 20세기 히틀러의 나치 독일 같은 강대국의 공격을 받을 우려가 크다는 주장이다.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을 세력권에 넣은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21세기 주권국가에 완충지대가 되기를 강요할 수는 없다는 데서 이는 무리한 주장이다.

셋째, 러시아 영향권을 확대해 글로벌 패권국가로 다시 서는 것을 국가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정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이론에 푸틴이 심취했다는 설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흡수 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두긴은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개인주의·글로벌리즘에 반대하고, 서구 리버럴(liberal) 가치와 이념에 거부감을 보여 왔다.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와 글로벌 주도권 회복을 위한 ‘21세기 신유라시아주의(Neo-Eurasianism)’를 제창하고, 소련 붕괴 후 글로벌리즘을 주도한 해양세력 미국에 맞서 러시아는 독재와 종교가 통치이론인 대륙세력으로서 ‘신냉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로벌 영향권 확대를 향후 20년간 러시아의 국가 목표로 삼자고 주장하는 두긴은 나토를 리버럴 가치관의 확장 도구로 여겨 심한 거부감을 보여 왔다. 푸틴이 이런 주장에 푹 빠져 나토 가입을 원하는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파괴해 본보기로 삼으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 앞에 물러서지 않으면서 전쟁은 러시아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의 독립 및 친서구 의지를 무시한 것이 제1 패착으로 보인다. 

러시아가 2018년 이후 본격화한 서구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전차·지대공 미사일 및 드론 공급과 관련 군사 교육 제공의 효과를 무시한 것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2020년 9~11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터키에서 들여온 드론으로 아르메니아 기갑부대를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보고도 러시아가 별 대비를 못 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우크라이나를 얕잡아 보고 준비도 없이 개전했다면 ‘정보실패’로 볼 수밖에 없다. 정보 수집 및 판단 부족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소련제 대전차·지대공 미사일에 당했던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이나 미국이 비국가 행위자인 알카에다의 공격을 받은 9.11 테러에 비교할 수 있다.

 

여론조작, 사이버공격 등 동원한 ‘하이브리드 전쟁’…
세계적 혼조 상당 기간 지속될 듯


『손자병법』 모공(謀攻)편에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싸움에서 반드시 위태롭다)’라고 했는데, 초기 전과만 보면 러시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러시아는 2012년 취임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이 주도한 군 개혁에 따른 직업군인 확보와 대대전술단(BTG; Battalion Tactical Group) 편제 효과를 지나치게 믿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푸틴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의 ‘게라시모프 독트린’에 취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현대전의 개념을 가짜뉴스와 왜곡된 정보 등을 통한 여론조작, 미디어를 동원한 선전·선동과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심리전, 사이버공격 등으로 상대 인프라를 마비시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바꿔놨다. 러시아는 지난해 말부터 이를 시도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국민의 의지를 꺾지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지원을 끊지도 못하고 있다. 세계가 상당 기간 혼미 속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 것으로 전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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