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한층 더 커졌다. 이를 반영해 최근 세계은행이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4.1%에서 3.2%로 1%p 가까이 낮췄다. 한국경제 성장률 전망치도 2% 중반대로 하향조정되고 있다. 오미크론 등 변이 바이러스 확산과 인플레이션 공포로 세계경제 회복에 적신호가 켜진 상태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글로벌 리스크 확산 속에 정권교체 맞이한 한국,
해결해야 할 과제 산적해
IMF는 세계경제 3대 위험요인으로 미국 통화정책 정상화, 우크라이나 사태,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둔화를 꼽았다. 이에 더해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중국의 상하이 봉쇄, 일본 엔화 약세 등 여러 리스크가 동시에 몰려오고 있다. 미중 패권경쟁, 글로벌 공급망 훼손, 차이나 리스크, 탄소중립 등 잠재적 폭발력이 큰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위험요인이 더해진 것이다. 국제금융협회(IIF)가 “국제사회가 인플레이션에 대응하지 못하면 ‘퍼펙트 글로벌 인플레이션 스톰’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 것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국내 상황도 녹록지 않다.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 수의 30%가 한국에서 발생할 정도로 오미크론 바이러스 확산세가 빨랐고, 사회적 거리 두기 해제 등으로 변이 바이러스 재확산 우려도 적지 않은 상태다. 팬데믹 대응에서 엔데믹 대응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코로나19라는 초대형 글로벌 악재에 묻혀 있던 정책실패와 구조적 취약성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폭등한 부동산 가격과 1,800조 원을 훌쩍 넘어선 가계부채,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재정건전성, 개선되지 않는 청년 일자리, 심화된 양극화, 고갈돼 가는 연금기금, 전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등 어느 것 하나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줄이고 정책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사안들이기는 하지만, 정확한 현실 진단을 토대로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현상을 유지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현상 유지’가 아닌 ‘국가 소멸’을 가져올 수 있다.
정책 우선순위 정하고 역량 집중해
불확실성 낮추고 정책 신뢰도 높여야
팬데믹이 초래한 위기는 우리의 일상을 크게 바꿔놨다. 디지털 전환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성장과 분배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다. 새로운 기회와 위험이 동시에 나타났고, 이러한 변화에 얼마나 신속하게 적응하는가가 생존의 열쇠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긴 했지만, 역설적으로 위기가 한국경제의 체질을 개선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두 사건 이후 회계제도, 기업지배구조, 사외이사제도, 공시제도 등이 대폭 개선되면서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번에 닥친 위기는 안타깝게도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체질과 환경 개선의 골든타임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지금과 같은 초불확실성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굴과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규제혁파’를 들 수 있다. 정체돼 있는 산업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가정신이 살아나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민간 주도 혁신과 고용의 유연화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대 정부가 민간 주도 혁신을 내세웠지만, 예산과 규제를 통해 관(官)이 좌지우지해 왔다. 정통 관료 출신들이 윤석열 정부의 경제사령탑으로 라인업된 것은 변화보다는 안정성에 방점이 찍힌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혁신과 규제혁파에 대해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워 보인다.
정부의 역할은 혁신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지, 혁신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혁신을 빙자한 정부실패를 자초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초인 2018년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혁신 토론회에서 ‘규제혁신, 내 삶을 바꾸는 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규제혁신을 강조했다. 3년 뒤에는 신산업 규제혁신의 패러다임을 ‘선 허용, 후 규제’로 전환한 대표적 사례로 규제샌드박스를 소개하면서 투자 유치와 일자리 창출 성과를 홍보하기도 했다. 그런데 규제샌드박스를 제도화하기 위한 ‘규제샌드박스 5법’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었다.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21대 국회에서 규제 법안 발의가 폭증했다고 한다. 말로는 규제를 풀겠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규제가 늘고 있으니 시장과 기업이 정부를 믿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또한 준조세 성격이 강한 협력이익공유제와 ‘사회연대기금법’과 같은 새로운 기업규제 관련 법 제정을 밀어붙이면서 다른 쪽에선 규제샌드박스를 추진한다고 하니 진정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1998년 「행정규제기본법」을 만들면서 규제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한 지 2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입증책임을 민간에 귀속시키는 구시대적 규제개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모든 규제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는 반시장적, 반기업적 규제는 없어져야 한다. 코로나19가 앞당긴 디지털 전환을 선도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 제정과 같이 규제를 푸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디지털 지구시대 패권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혁신과 협업이 보다 활성화될 수 있도록 걸림돌을 제거하는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 디지털 전환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파괴적 경쟁과 기술’에 의한 산업 재편과 융합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그 결과 사회·경제 시스템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규제 메커니즘이 구축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