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인플레이션 관련 불확실성은 매우 크다. 몇 달 앞을 내다보기도 어렵다. 연초에 발표됐던 2%대 전망 수치들이 6개월도 지나지 않아 4%대로 수정되는 상황이다. 물가 전망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세계경제가 과거의 글로벌 저물가 환경에서 이탈해 일종의 변곡점에 와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물가가 앞으로 어떤 궤도에 안착할 것인지는 글로벌 물가 환경의 향방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주요국의 정책대응과 글로벌 공급망 상황이 중요한 요인들이다.
국내 물가는 소비 회복세, 임금 상승 등 상방 압력 큰 상황
우선 미국 등 주요국의 정책대응은 물가 안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1970년대에도 저물가에서 고물가 기조로 전환되면서 지금 같은 불확실성이 문제가 됐다. 당시 미국 정책당국자들 사이에서는 인플레이션은 공급 요인에 기인한 것이고, 통화정책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이들의 생각보다 심각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약 15년 동안 미국의 연평균 물가상승률은 7%를 기록했으며, 폴 볼커 당시 미국 연준 의장이 기준금리를 20%까지 높이는 초강력 처방을 내놓고 나서야 비로소 물가가 안정궤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은 당국자들로 하여금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되기 전에 충분히 대응하자는 생각을 갖게 한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정책당국이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처럼 소극적 대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고물가 현상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즉 당국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강력한 선제대응을 불사할 것이므로 인플레이션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안정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물가상승률을 2%로 안착시킬 때까지 강력한 대응을 계속하겠다고 공언하고 있고, 조 바이든 대통령과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이러한 대응 기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당국의 희망대로 거시경제가 연착륙할 수도 있고, 물가가 안정되면서 경기침체가 발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물가가 안정되지 못하면서 경기가 침체돼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도 있다. 어느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것인지는 정책당국이 얼마나 신뢰성 있게 정책을 펼칠 것인지,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 문제가 어느 수준에서 해결될 것인지 등에 달려 있다.
공급망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자. 향후 우크라이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제한이 계속되고, 동시에 중국의 코로나19 봉쇄조치가 완화돼 원유 수요가 늘면 국제유가의 상방 압력은 높은 수준에서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곡물 가격 역시 전쟁으로 인한 생산 차질, 주요 곡물 생산국의 수출 제한 등으로 상당 기간 상방 압력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이러한 공급망 상황이 당장의 병목현상뿐 아니라 상당 부분 세계질서의 변화와도 관련된다는 점이다. 크게 보면 세계화의 후퇴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의 흐름은 국가 간의 기술·정치 패권 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중국과 동유럽이 미국 중심 세계질서에 편입됐던 1990년대 이후 지속돼 온 글로벌 공급 확대 기조가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이 상황이 안정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불확실한 만큼, 비용 효율성보다는 안정성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상당 기간 글로벌 저물가 환경이 쉽게 재현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향후 우리나라의 물가는 미국의 금리인상과 글로벌 공급망 문제라는 환경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 국내 물가 동향을 보면, 석유류·식품뿐 아니라 서비스물가의 상승세도 가시화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에 따른 소비 회복세도 나타나고 있다. 기대인플레이션이 높아지고 있어 임금 인상 압력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은 공급 및 수요 측 물가 상승 압력이 모두 높은 수준으로 지속되면서 당분간 5%를 크게 상회하는 인플레이션 상황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원자재 공급 여건이 개선되거나 국내외 경기 회복세가 둔화되면 물가 상승 압력도 약화될 수 있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상방 압력이 큰 상황이다.
조세·재정·통화 정책 적절히 활용하고
공급능력 확대에도 힘써야
인플레이션을 적정 수준으로 안착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급 문제는 우리가 통제하기 어렵지만, 물가 상승의 진원지가 되는 수입 원자재 및 관련 부문에 조세·재정 등의 수단을 탄력적으로 활용하면 비용 충격이 여타 부문에 전이되거나 확산되는 현상을 완화할 수 있다.
한국은행은 물가 상승이 인플레이션 기대의 전반적 확산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신뢰성 있게 정책을 펼쳐야 한다. 특히 미국이 빅스텝·자이언트스텝으로 금리를 올리면서 한미 간 금리 역전 가능성이 우려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원만히 다뤄 시장의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달러 유출입 흐름과 이에 따른 환율의 안정성은 물가에도 영향을 주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정책당국은 사후적으로, 예기치 못한 금리 상승 등으로 피해를 보는 취약계층과 코로나19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빚을 내 버티다 이자 부담이 늘어난 자영업자 등에 대해서는 재정과 정책금융을 적절히 활용해 어려움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
나아가 공급 문제가 중요해진 만큼 중장기적으로 우리 경제의 공급능력을 확충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고압경제(high-pressure economy)’ 정책, 즉 재정 확대 등 수요증진 정책을 중시하다 최근에는 ‘현대 공급경제학(modern supply-side economics)’을 바이든 정부의 새 경제정책 브랜드로 제시하고 있다. 1980년대의 공급경제학과 달리 현대 공급경제학은 정부가 노동공급 확대, 교육, 연구개발, 인프라 투자 등을 통해 공급능력을 확대하고 공급 측 애로를 해소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정책을 말한다. 한국도 환경 변화에 맞춰 이와 같은 공급능력 확대 정책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 역시 정부와 협력해 안정성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면서 에너지, 유통망 등의 효율을 높이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플레이션은 대외적 요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국내 경제주체들의 대응에도 크게 좌우될 것이다. 적절한 대응을 통해 거시경제 안정성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면 물가 안정을 위한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변화의 흐름 속에 새로운 기회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