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 ‘개방정책(open door policy)’에 기반해 나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다수의 동유럽 국가를 나토에 가입시켰다. 계속되는 나토 확장은 러시아에 안보위기와 체제 위협을 가져다줬다. 2008년 나토 정상회의 이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논의가 본격화되자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했는데, 푸틴 러시아 대통령 입장에서 구소련 영토이자 러시아의 앞마당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허용할 수 없는 레드라인이었다. 또한 푸틴은 친러 성향의 분리주의자들을 동원해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인 돈바스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등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방해하려 했다.
이후 돈바스의 평화를 위해 2014년과 2015년에 걸쳐 민스크협정이 체결됐으나 1차 협정과 2차 협정 모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협정에 불만을 품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갈등을 지속했으며, 우크라이나와 나토의 관계는 점차 가까워지게 돼 2020년 나토는 우크라이나에 ‘향상된 기회의 파트너(EOP; Enhanced Opportunities Partner)’ 지위를 부여했다. 러시아와 서방국가 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올해 1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접경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을 전개했다. 뒤이어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다자회의서 기후변화·신기술 협력 통해
중국 배제한 글로벌 공급망 구축하려는 미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나토 가입국들의 단합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민주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동맹국 및 파트너 국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으며,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목적을 위한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가입을 신청하고, 미국 및 나토 가입국들은 대러 경제제재를 단행했으며, 독일 등 EU 회원국들은 러시아산 원유 및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디커플링은 공급망의 교란을 가져오기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국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독일은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중단하면서 가스요금이 50% 인상됐다. 또한 전 세계 밀 수출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밀 공급이 끊어지면서 우크라이나의 곡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중동·북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량위기를 겪게 됐다. 대러시아 경제제재로 인해 지금까지 형성돼 있던 세계화 질서 및 경제적 상호의존성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의 동진으로 인해 자국의 안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러시아의 위기감으로부터 발생한 것이지만, 결국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가능케 했던 것은 미국의 힘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부터 미국의 패권은 이미 줄어들고 있었지만, 이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중심으로 유지되던 국제적 규범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기존의 세계화 추세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과거 트럼프 행정부는 그간 미국이 유지해 온 글로벌 패권에 대해 국제사회에 비용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 여러 다양한 현실주의 학자도 미국의 국력이 과거와 달리 줄어든 상황에서, 앞으로는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견들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과거 미국이 누리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미국의 패권국 지위보다 미국의 협소한 이익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된 미국의 ‘중국 견제’와 맥을 같이한다.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견제 핵심은 글로벌 공급망 구축과 여기에서의 중국 배제다. 바이든 행정부는 글로벌 공급망 검토과정을 올해에 거의 마무리할 것으로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첨단산업과 관련한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좀 더 세밀하게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해 2월 24일 반도체·배터리·희토류·의약품에 대한 100일간의 공급망 검토 행정명령을 내렸으며, 향후 1년간 국방·공중보건·IT·운송·에너지·식품생산 분야의 공급망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 안보협의체인 쿼드(Quad) 정상회의에서 논의된 주요 협력의제는 보건·신기술·기후변화 부문이었는데, 미일 정상회담, 한미 정상회담, G7 정상회의에서도 협력의제는 동일하게 합의됐다. 즉 미국은 다양한 국가와 코로나19 보건협력, 기후변화 관련 협력, 5G·6G 등 신기술협력을 이뤄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도 이와 같은 미국의 공급망 구축은 점점 더 촘촘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반도체 분야 기업체들에 정보 제출을 요청했으며,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점차 줄이도록 압박하기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미국 국무부는 주요 산업 부문별 글로벌 공급망 지도를 만들고 있으며, 촘촘한 공급망 지도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중국 배제 전략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한미협력 강화와 수출입 경로 다변화 병행해
중국에 대한 전략적 자율성 확보해야
미중 경쟁 구도가 점차 제로섬 게임으로 전개되면서 한국의 전략도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향후 점차 어려워질 한국의 균형외교 방향을 제시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국익과 전략적 방향성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이를 일관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안보 문제와 관련해 현재 한국은 중국이 제기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사드) ‘3불(不) 1한(限)’ 주장(사드를 추가 배치하지 않고,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에 참여하지 않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맺지 않는 ‘3불’에 기존 사드 운용을 제한한다는 ‘1한’의 내용)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중국 측에 전달했다. 중국은 미국의 사드체계 X밴드 레이더망이 중국을 탐지한다는 이유로 사드 배치에 반대해 왔으나, 중국 역시 동북 3성과 산둥성 지역에 한국을 탐지하는 레이더를 설치해 놓은 상태다.
더 이상 중국의 사드 철회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현재 한국은 중국의 안보를 걱정해 줄 상황이 아니다. 북한이 신형미사일체계를 개발해 실전 배치하고 있기 때문에 촘촘한 미사일 방어막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를 모두 동원해 사각고도의 방어막까지 새로이 구축해야 한다. 또한 북한의 핵탄두 역시 점점 소형화되고 있으며 저위력 전술핵탄두를 이용해 한국을 실질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 경우 미국이 핵으로 보복할 것이라고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향후 우리의 사활적 국익에 기반해 일관된 대중국 외교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둘째,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팽창을 막고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한미협력은 우선적으로 강화돼야 하며, 동시에 중국의 대한국 경제보복에 대비하고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출입 경로를 다변화하고 관련국들과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중국의 경제보복에 대해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 더 이상의 경제보복은 한중관계를 완전히 훼손할 것이며 지속적으로 단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잃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한국은 중국에 대한 전략적 자율성 확보를 위해 외교 및 무역 다변화를 지금부터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지난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같은 정책을 다양한 지역에 추진하는 등 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