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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재정제도 개혁 선행해 국가가 내 돈을 잘 쓰리라는 국민의 신뢰 얻어야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 2022년 11월호


지금 세계는 유례없는 홍역을 앓고 있다. 보건위기가 금융위기·재정위기로 전이되면서 세계경제는 앞을 예견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다. 팬데믹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재정운용과 팽창적 화폐발행을 앞다퉈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끝 모르는 인플레이션과 금리상승, 거기에 환율급등까지 겹쳐 복합불황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동안 세계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왔던 글로벌경제의 리더십이 실종되고 미래에 대한 신뢰의 위기는 사태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으로 시작된 글로벌 공급망의 단절과 각국의 자국이기주의는 위기극복의 방향성을 보여주기보다 정책선택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 70여 년 재정역사는 
당시 시대적 과제를 충실히 감당한 성과


현재의 재정위기는 우리에게 기시감이 있다. 2008년 9월 일어난 리먼 브라더스 파산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져왔고 각국이 이에 대응해 확장적 재정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많은 국가의 재정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리스, 포르투갈,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들이 대표적으로, 그동안 복지지출을 과다하게 늘리다가 경제위기가 도래했을 때 정작 재정지출을 늘릴 여력이 없어 국가부도 사태를 맞게 됐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재정위기가 발생하는 원인은 국가별로 다소 상이하지만 재정운용을 지나치게 안일하게 운영함으로써 생기는 만성적인 재정적자, 수출부진 등 취약한 사업구조로 인한 대외채무 증가, 정부의 위기대응능력 부재 및 정부에 대한 낮은 신뢰 등이 공통적으로 지목된다.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있다. 재정을 운용하는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중장기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는바 우리나라가 복지와 환경 그리고 전략산업에 대한 지원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결코 축소지향의 재정건전화만으로는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 국가가 내 돈을 잘 쓰리라는 믿음에 기초해 세금을 충실히 거둘 수 있는 행정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생 추이, 저성장 기조, 정치 포퓰리즘적인 복지논쟁, 그리고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으로의 끝없는 집중, 여기에 북한 문제라는 안보와 통일 대비 비용까지 감안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건전한 재정운용 과제는 결코 녹록한 이슈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과거 70여 년 재정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당시에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를 충실히 감당해 왔다는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원조경제기를 거쳐 경제개발기의 재정은 국내 고정자본 형성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함으로써 빈곤 탈출과 자립경제 기반 구축의 일익을 톡톡히 감당해 왔다. 안정화 시기에는 인플레이션을 구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경제를 안정화하기 위해 재정운용 방식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역점을 뒀다. 세계화와 사회형평성 추구라는 새로운 변화 속에서 재원배분의 중점이 경제에서 복지로 전환되면서 재정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자리 잡게 됐다. 

해방 이후 우리 재정은 빚더미에서 출발했다. 이제 선진국의 문턱에서 국민들에게 지속 가능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미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에 직면해 있다. ‘축적의 일본’과 ‘흐름의 한국’과 같은 이분법적 사고로는 고질적인 형식주의와 정부실패를 극복하기 어렵다. 정치문화 성숙 등 근본적인 접근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다. 오히려 작금의 복합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 때와 비슷하게 철저한 거듭나기를 할 수 있는 꼭 필요한 기회일 수 있다. 다음은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들이다.

국민적인 공감대 속에 고질적인 형식주의와 정부실패 극복해야

첫째, 지속 가능한 재정대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재정제도 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역사적 경로의존성이라는 명제에는 예외가 없는바 우리의 4대 재정개혁도 마찬가지였다. 국가재정운용계획이라는 중장기 재정운용의 틀, 총액배분 자율편성이라는 분권화된 재정운용체계, 지속 가능한 혁신과 증거에 기반한 성과관리, 거기에 디지털 예산회계시스템이라는 첨단 재정정보체계가 어우러져 오늘날의 재정운용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형식주의라는 비판과 정치에의 예속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중기재정계획의 구속력 확보와 재정준칙의 준수, 지출 구조조정과 지출점검의 중장기예산 연계가 가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년도 중심의 미시적 예산배분에 한정됐던 예산당국의 역량을 중장기 거시재정 총량 중심의 프로그램 예산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행정부의 예산편성 단계만이 아니라 입법부의 예산심의 단계에서도 거시총량 중심이 강조돼야 한다. 자연스럽게 경제전망과 재정추계에서 장밋빛 화장을 하는 관행을 배제할 수 있는 독립된 재정위원회의 역할도 마련돼야 하리라.

둘째, 정치·사회 문화가 바뀌고 중앙과 지방의 접근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며 보다 분권화된 정치시스템을 요구한다. 우리의 2022년도 2분기 합계출산율이 0.75명이라고 한다. 서울만 집계하면 0.6명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수도권 집중현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년 뒤인 2030년이면 베이비부머들이 대부분 현업에서 은퇴하고 이때가 되면 생산인구 급감,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초저출생·수도권 집중 현상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대안으로 서울과 같은 매력적인 도시를 최소한 여럿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분권도 획일적인 접근으로는 매번 초입에서 왜곡되고 마는 현상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양성과 입체적 접근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마지막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시민의식의 회복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정신혁명과 함께 했기에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자. 제도개혁도 정치문화 개혁도 모두 시민의식의 발로가 없이는 넘기 어려운 산이다. 일제 식민통치를 극복하기 위한 국채보상운동, 임진왜란을 극복한 의병운동,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금 모으기 운동 등은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재정은 필요할 때 충실하게 쓰기 위해서 평상시 건전하게 운용해야 한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 개혁, 국민연금 개혁 등 코앞에 닥친 제도개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재정운용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작이 반이고 첫걸음이 중요하다. 국민은 현명하며 진심으로 소통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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