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중동시장은 주로 건설과 석유라는 하드파워의 관점에서 접근됐다. 그러나 ‘문화의 시대’라 일컬어지는 21세기에는 중동과의 교류도 문화를 중심으로 한 소프트파워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고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 간 소통방식과 삶의 패턴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에서 주류문화로 자리 잡은 한류,
하지만 K팝과 K드라마에 의지한 성장공식 한계 달해
K콘텐츠는 우리나라 소프트파워의 핵심자산이다. K콘텐츠의 중동시장 진출은 2004년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파병과 함께 시작됐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겨울연가>, <가을동화>와 같은 인기 드라마를 수출해 한국군 파병으로 중동 사람들이 갖게 될 수 있는 오해와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한국드라마를 처음 시청한 중동의 젊은 여성들은 한국드라마에 매료됐고,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팬덤을 형성하며 한류의 성장을 이끌었다. 중동에서 한국드라마가 특히 인기 있었던 이유는 콘텐츠가 그들의 문화코드에 부합하는 동시에 신선했기 때문이다. 한국드라마는 스토리텔링 방식이 섬세했고, 배우들의 감정몰입도가 컸으며, 배경이 되는 자연환경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웠다. 이성 간 애정표현도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권에서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드라마의 인기는 이후 K팝으로 이어지면서 중동에서 한류는 더욱 성장했고, 20년이 지난 지금은 소수 마니아 중심의 변방문화에서 주류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K콘텐츠의 영향력은 이제 게임, 영화, 음식, 화장품, 관광 시장까지 확대돼 다양한 영역에서 소비창출로 이어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등을 중심으로 넷플릭스에서 K드라마 구독자 수가 증가세에 있으며, K팝 음원 소비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 음식에 대한 호감도 높아지며 과거 소규모 에스닉(ethnic) 마트에서나 팔던 한국 라면, 냉동만두, 과자를 일반 대형슈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고, 한국 화장품 브랜드도 쇼핑몰에 입점해 있다. K콘텐츠에 매료된 한류팬들은 한국문화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한국을 찾는다. K콘텐츠의 중동 진출 사례는 문화가 경제적 이익 창출의 동력이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K팝과 K드라마에 의지한 성장공식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점 또한 인지해야 한다. K콘텐츠의 주요 소비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젊은 여성층에 머물고 있다. 이들에게 K팝과 K드라마는 10대의 풋사랑과 같다. 젊은 날 잠시 찾아왔다 가버리는 풋사랑처럼 K콘텐츠에 대한 애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식어버린다. 따라서 K콘텐츠도 이들 여성의 라이프사이클 변화에 따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장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K콘텐츠의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지지층인 젊은 여성 소비자를 넘어서 대상을 넓혀야 한다. 한류의 스펙트럼이 젊은 남성층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되도록 시장을 세분화하고 특화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K콘텐츠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중동 사람들은 한류에 대해 ‘지나치게 상업적’(28.9%), ‘획일적이고 식상’(28.0%),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12.6%)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K팝과 K드라마에 갇힌 한류의 성장모델로는 중동시장 진출에 한계가 있으며, K콘텐츠의 진출방식도 새로운 모델로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이 공격적인 중동 진출의 적기…
중동의 신세대 문화엘리트들과 협업하며 시장 키워야
그렇다면 K콘텐츠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저변 확대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문화와 사람, 즉 시장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아직 중동에 대해 충분한 공부가 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2015년 중동의 할랄시장 진출 정책이다. 당시 정부는 성장세에 있던 할랄시장 진출 필요성을 인식하며 1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인증제도 구축과 도축장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부의 할랄사업은 기대했던 성과에 미치지 못하고 마감돼 버렸다. 할랄시장이 왜 성장세에 있었는지, 전통과 관습·종교가 현대화된 식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 계층이 어떤 식품을 소비하는지 질문하고 분석하기보다 할랄인증이 곧 성공적인 시장진출을 보장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할랄시장의 성장세는 가치소비가 중산층 무슬림 MZ세대의 소비관에 작동한 결과였다. 무슬림 MZ세대는 글로벌 트렌드인 가치소비를 자신들의 정체성의 한 축인 이슬람의 틀에서 녹여 내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할랄인증마크 자체가 아니라 종교적 소비였다. 이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현상에만 집중할 경우 시장을 오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도라는 현상만 보지 말고 파도를 만들어내는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지금은 K콘텐츠가 중동시장에 공격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적기다. 양쪽이 서로 ‘윈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K콘텐츠의 중동 진출로 일차적으로는 경제적 이윤을 추구할 수 있다. 중동지역은 ‘디지털 네이티브’인 MZ세대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매우 젊은 시장이다. 고령화가 돼가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시장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가처분소득이 창출되고 있다. 또한 디지털로 전 세계와 연결된 중산층 소비자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들은 이미 K드라마, K팝, K게임 등에 호감도가 높다.
그들 입장에서, 특히 포스트오일 시대를 대비해 산업다변화를 추진하는 산유국의 입장에서, 한국은 성공적인 롤모델을 제시한다. 중동에서 가장 보수적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조차도 석유 중심 산업구조에서 벗어나 개방과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2017년부터는 ‘온건 이슬람’ 정책을 선포하며 완고한 이슬람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과거 ‘금지된 영역’에 속했던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적극 육성하고, MZ세대를 주축으로 새로운 문화엘리트를 양성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한국에 통 큰 투자도 성사됐다. 우리는 중동을 단순한 K콘텐츠의 소비시장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중동의 신세대 문화엘리트들과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협업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시장의 파이를 키울 필요가 있다.
K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소프트파워 교류협력은 경제적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정치외교 관점에서 서로에게 매우 유용하다. 21세기 들어 국제질서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민족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중동은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아시아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는 ‘룩 이스트(Look East)’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 역시 미국과 중국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강력하게 우리를 지지해 줄 우리 편을 만들기 위해 관계 다변화에 힘써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K콘텐츠는 ‘사람과 사람’, ‘감정의 소통’에 기반한 정서적 연대를 구축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우리는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을 통해 얻은 종잣돈으로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 향수로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제2의 중동 붐’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과거의 기적을 재현하고 싶어한다. 기대가 공염불로 끝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또 지속성을 갖출 수 있도록 중동 국가와 상생과 협업의 모델을 만들어 타이밍이 왔을 때 기회를 붙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