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지하 360미터 유정에서 22미터 높이로 석유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렇게 이란의 남서쪽 후제스탄주 마스제드솔레이만에서 영국이 석유를 발견했다. 중동 최초였다. 이에 힘입어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은 군함의 동력을 석탄에서 석유로 바꿔 속도와 정숙성을 높였다. 이어 1927년 이라크(키르쿠크), 1932년 바레인, 193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가 터져 나오면서 중동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자원의 보고로 진가를 톡톡히 발휘했다. 나토 사령관을 지낸 미국 4성 장군 클라크의 말처럼 석유 없는 중동은 아프리카와 다를 바 없다. 자원이 없다면 굳이 열강이 그곳 일에 애써 개입하려 할까? 지난 한 세기 동안 중동은 세계 산업에 검은 혈액을 끊임없이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곳으로 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중동 붐’은 현재 산유국이 처한 엄혹한 상황의 산물
그러나 1998년 미국이 셰일유 추출 방법을 발견하면서 중동 산유국에 위기가 닥치기 시작했다. 2011년 미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가스생산국, 201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밀어내고 세계 최대 석유생산국 자리에 올랐다. 기후위기로 국제사회가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대변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동 산유국의 고민은 한층 깊어졌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탈화석연료 산업 다각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최근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중동 붐’은 산유국이 처한 엄혹한 상황의 산물이다.
유일한 예외라면 원유 매장량이 아랍에미리트(UAE) 전체 매장량의 4%에 불과한 두바이다. 자원에 의존해서는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라시드 빈 사이드 알 막툼 두바이 전 국왕은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낙타를 타셨고, 나는 메르세데스를, 나의 아들은 랜드로버를 몬다. 내 손자는 랜드로버를 몰겠지만 내 증손자는 낙타를 몰 것이다.”라며 미래 세대가 다시 낙타를 타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석유로 번 돈을 도로·수로·항만 등 기반시설에 투입하고, 비석유 분야 위주의 국가 건설에 일찌감치 나섰다. 두바이의 선택은 탁월했고, 이룩한 일은 우리가 지금 보는 대로 경이롭다.
두바이와 연방을 이룬 아부다비 역시 50년 후 마지막 석유를 수출하면서 웃는 나라가 되기 위해 재원을 교육에 투자한다. 잠자던 사자 사우디아라비아도 변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젊은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은 석유중독증에 걸린 왕국을 전 국민의 67%를 차지하는 35세 이하 젊은 층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라로 만들려 한다. ‘네옴’ 프로젝트는 두바이가 보여주지 못한 것을 이루려는 무함마드 빈 살만의 야심작이다.
천연가스 자원의 힘으로 움직이는 카타르는 지식기반 경제로 살길을 찾고 있다. 해외 유명 대학을 불러 만든 에듀케이션시티는 미래 먹거리를 만들 곳이다. 미국 해군 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은 두바이가 허브로 부상하기 전 명실상부한 중동의 항공과 금융 중심지였다.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바레인도 핀테크로 두바이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한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 2023년 두바이 유엔기후협약 당사국총회(COP28), 2029년 사우디아라비아 동계아시안게임 등 국제적 행사를 다투듯 개최하는 것도 바로 산업 다각화의 중요한 축인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중동 산유국은 비석유 제품 소비국에서 생산국으로 변모하고자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한데, 선뜻 기술을 제공하려는 나라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술 이전에 적극적이라 중동 산유국이 협력사업을 하기에 최적이다. UAE가 우리와 협력을 강화하는 이유다.
우리 기업 간 출혈 경쟁 경계하고,
기술 이전 활용하되 기업의 결정 존중하고 보호해야
좋은 기술이 있어도 국가 브랜드파워가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 떨어져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우리나라로서는 기술을 주더라도 산유국 사업에 함께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이전할 것인지 기업이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고, 기업의 결정을 우리 정부가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 아울러 출혈 경쟁을 피해야 한다. 사업을 따내기 위해 우리 기업끼리 무한 경쟁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중동 건설시장에서 우리 기업들이 서로 무한 경쟁을 벌여 저가 수주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감리 과정에서 엄청난 적자를 본 쓰라린 경험이 있다. 정부나 기업이 수주 효과만 노려서는 위험하다. 대단위 공사를 저가로 따오면 언론의 주목을 끌고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정부, 기업, 국민 모두 손해를 본다. 이 같은 패착을 반복한다면 중동 붐이 아니라 중동 재앙이 돼 우리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다.
중동 산유국 중 UAE,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에서 사업 규모나 진행 상황상 현재 우리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만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역시 예의주시해야 한다. 아라비아반도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하는 현실을 인식하고 각 국가별로 시장조사를 철저히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우리는 이들 국가 상황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일을 소홀히 했다. 대학이나 기업, 국가 차원에서 제대로 된 연구소나 연구진을 양성하지 못했다. 양과 질 모두 OECD 회원국 중 하위에 처져 있다. 이제부터라도 연구세대 양성에 힘써야 한다. 연구결과가 나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해 지금 눈앞의 사업에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시대적 변화가 나타나는 시간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대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관광산업을 추진하는 분위기에 걸맞게 우리의 독창적인 디자인과 문화 역량을 상대국에 발휘할 수 있도록 문화산업 진출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 좋은 결과를 낼 것이다. 한류 흐름을 타고 문화 강국의 이미지를 조성할 수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주목을 끈 김신애 작가의 독창적인 그림은 문화 교류의 새 지평을 열었다. 상대국의 유명한 문학작품이나 국가 소개서를 번역해 민간 차원의 교류를 확장하는 것 또한 중동 붐을 오래 끌고 가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중동 산유국의 탈화석연료 산업 다각화 정책의 핵심은 지식기반 경제다. 우리 젊은이들의 벤처사업 의지를 산유국의 지식기반 경제에 접목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좋겠다. 벤처는 실패가 90%다. 실패에서 배울 수 있도록,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도록 꾸준히 밀어주는 노력을 산유국 정부와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청년 실업이 사회문제인 산유국에도, 우리에게도 상생의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끝으로, 중소기업을 밀어주자. 대기업은 혼자서도 잘하지만 중소기업은 다르다. 정부의 지속적인 도움이 있어야 한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정부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다.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중동 붐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뒤에서 정부가 성실한 조력자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