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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소비 기준 축 전환의 시대
채선애 마크로밀 엠브레인 컨텐츠사업부장 『2024 트렌드모니터』 공저자 2024년 01월호

2023년 상반기, 한국 사회에 독특한 현상 하나가 등장했다. 익명의 사람들이 지출 내역을 공유하며 극강의 절약을 다짐하고 끝에는 결국 ‘우리는 거지입니다’로 마무리되는, 일명 ‘거지방’이라는 오픈채팅방이다. 2022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불황의 여파가 청년층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으로, ‘디지털 폐지줍기’, ‘무지출챌린지’ 등의 짠테크 움직임이 어느새 ‘거지’를 자처하며 소비행동에 무자비한(?) 철퇴를 가하는 움직임으로까지 확산됐다.

그런데 더더욱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했다. ‘거지방’을 운운할 정도로 짠내 가득한 일상을 보낸다는 청년들이, 스펠링을 발음하기조차 어려운 매우 생경하고 낯선 브랜드의 매장 오픈런을 감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급의 명품까지는 아니지만 기존 명품 못지 않은 디자인과 품질, 남과 다른 특별함과 희소성까지 갖춘, 이른바 입소문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져 있는 ‘신(新)명품’과 ‘디브(디자이너 브랜드의 줄임말)’가 그 주인공이다.

단순히 ‘일부’ 여유 있는 사람들의 ‘일시적’ 유행은 아닌 듯하다. 이들을 향한 구애는 더현대서울을 ‘에루샤 없는 1조 매출의 백화점 등극’이란 타이틀을 거머쥐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고, 장기적이다. 한쪽에선 극강의 절약 실천을 추구하는 거지방이 확산하고, 또 다른 한쪽에선 대단한 고가 명품은 아니지만 ‘나름’ 프리미엄급의 명품을 좇는 소비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왠지 극단적이고 아이러니한 소비 현상의 공존, 도대체 이유가 뭘까?

차순위 소비 전략, ‘기준’의 하향화

패션업계 관계자들은 신명품과 디브의 흥행을 정통 명품에 식상함을 느낀 소비자들이 아는 사람들만 찾는 희소성과 특별함이 있는 브랜드를 찾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런데 정말 그 이유가 다일까? 전문가들마다 해석이 분분하겠지만, 리서치 전문기업 마크로밀 엠브레인에서 지난 7월 2030세대 1천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2023 명품소비 관련 인식 조사’ 결과를 들여다보면 한 가지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로 2030세대 10명 중 7명 이상(76.6%)이 꼭 고가의 명품이 아니더라도 플렉스(과시소비)할 만한 자기만의 소비 기준이 있다고 응답했다. 즉 명품에 대한 인식과 소비 전반에 대한 의미 부여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결과로, 핵심은 확실한 플렉스 소구용이라기보다 ‘마치 플렉스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딱 그 정도의 수준으로 소비 행위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지방이란 오픈채팅방이 유행할 만큼 경제적 상황이 녹록지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해지고 싶지는 않은 2030세대에게 신명품과 디브는 차순위 소비 전략으로서 좋은 대체재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상황을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면, 어려운 상황이 오래갈 것이라 생각되면, 으레 인간은 자신의 기대수준과 태도를 바꾸기 마련이다. 현재 2030세대들은 그 어떤 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소비의 방향과 대상, 즉 전체적인 ‘소비의 기준’을 바꾸고 있다. 본투비(born to be)가 아닌 이상 상향 소비의 길로 직진하기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자각한 그들에게 최선의 선택은 바로 플렉스 느낌을 담보한 소비 기준의 하향이다.

유수의 경제 전문가들은 국내 경기가 최악의 국면을 맞이한 2023년에 이어 2025년까지 이 같은 경기 침체가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어렵고 암울한 경기 지표는 소비자들의 불안도를 높이기 마련이고, 그래서 현재 소비자들의 구매력은 그 어느 해보다 가파른 감소세를 보이는 중이다. 물론 극강의 절약 모드에 상반되는 고가의 제품 구매 태도도 여전하다. ‘초절약 소비 태도’와 ‘초고가 명품시장’이 함께 크는 이전의 불황기 흐름과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다. 정통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브랜드나 제품을 선택하는 나름 최선의 대안으로 최고의 만족을 이끌어내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소비뿐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도 이와 유사한 맥락을 살펴볼 수 있다. 극단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로 차별화를 증명해 내는 데에 피로가 쌓인 소비자들이 이제는 이 같은 N극화 지향 사회에 높은 저항감을 보이고 있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개인의 취향은 존중돼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조되면서 공동체의 상식을 넘나드는 지식과 가치관까지 ‘개인 취향’으로 일갈하는 사회에 대한 경계도 더 높아졌다. 만약 경기 침체나 불황 등의 상황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N극화 지향 움직임은 평균을 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평균 실종, 평균 종말’ 트렌드로 더욱 강화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낙오 없는 경쟁은 없음을 인지한 대중이 남들보다 우월해야 하고, 남들과는 다른 게 있어야 한다거나, 능력도 사연도 특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흐름을 점점 거부하고 있다. 경기 침체, 불황이란 외부요인과 N극화를 향한 소비자들의 내재적 반감이 맞물리면서 독보적인 특이함, 특색있는 경험의 ‘버티컬 취향’, ‘버티컬 라이프스타일’ 추구 움직임이 주춤해진 것이다.

N극화 지향, 비교 경쟁에 무력해진 대중이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남들보다 내가 갖춘 조건이 좀 더 낫기를 바라는 비교우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경쟁우위에서 벗어나 꼭 최고가 아니더라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고 중간만 해도 괜찮은 것이라는 ‘사고의 전환’인 것으로 보인다.

평균 회귀 그리고 어중간함의 확장

이제 대중은 소비든 경험이든 능력이든 재능이든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가 인정하는 경험을 원하기 시작했다. 극단의 경험 추구가 결국 스스로에게 독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함과 동시에 판단의 기준을 ‘타인’이 아닌 ‘나’에 우선적으로 두며 진정성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모습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특별함, 희소성, 재능 우선주의에 묻혀 외면받던, ‘무난함’으로 대표되는 기본값(대체로 우리는 이것을 ‘평균’이라 부른다)을 회복하려는 흐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최소한의 기준만을 ‘겨우’ 채웠다는 커트라인으로서의 중간값의 의미가 재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대중은 기준의 하향을 원하고 있다. 오버 페이스가 아닌 평소 페이스로 살아가는 태도, 그것이 꼭 평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중은 또 다시 중간지점으로의 복귀를 원하고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특별함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만 존재했던 ‘어중간함’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수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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