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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산업과 노동의 상생적 비전 보여줘야 할 때”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2024년 05월호
 


현재 우리 노동시장을 진단한다면.
노동시장은 경제·산업 활동의 가장 핵심적 자원인 ‘인력’을 공급하는 곳이다.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은 산업 발전을 감당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인재들을 배출하고 공급했기에 가능했다. 이 노동력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고, 노동에 대한 보상을 어떻게 하는가를 둘러싸고 노동시장 나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데, 현실의 노동시장을 살펴보면 몇 가지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노동시장의 격차와 불평등이 굳어지고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또 일자리의 양보다 질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데, 고용이 불안정하고 취약한 상태다. 이 외에 산업구조의 변화, 기술 발전에 노동시장이 얼마나 잘 대비하고 있는가와 같은 문제도 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시장 격차가 유독 큰 이유는?
노동은 경제에서 파생되는 영역이다. 우리나라는 재벌 중심의 경제개발을 하면서 경제의 양극화가 생겼고, 이것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로 이어졌다. 대만만 하더라도 중소기업, 강소기업과 대기업이 잘 어우러지는 경제체제로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1987년 이전까지는 우리 노동시장 임금격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대기업의 임금을 100이라 했을 때 중소기업 임금 수준은 95였다. 노동계가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대기업까지 억눌려 있었던 것이다.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며 버는 만큼 나누자는 시장주의가 전면화됐고, 그 이면에서 노동조합의 활성화, 즉 노동운동이 일어나며 격차가 가파르게 확대됐다. 지금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50%대까지 떨어졌다. 또 성별 격차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제도적인 역사성 속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비정규직 문제는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으로 시작돼 굳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노동시장 개혁이 국가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는데, 정책이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노동시장의 문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거나 더 악화하고 있다.

그간 노동개혁이 어려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노동개혁은 크게 3개의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문제다. 첫째, 노사 간의 이해정치, 둘째, 제도권 내 정당 간의 정치, 셋째, 지식인과 언론 등의 담론정치다. 아무래도 보수정당은 친기업, 진보정당은 친노동 성향을 보이면서 노사의 입장이 고스란히 각 정당의 정책 대결로 나타나고 언론 등을 통해 여론이 증폭된다. 노동개혁이 워낙 치열한 이슈다 보니 풀어나가기가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다. 노동시장 내 격차를 줄이려면 사회적 대화 등을 통해 노사 간의 공감과 타협을 만들어내고 양보하게끔 하는 실력이 필요한데, 정권마다 반대 진영의 반발을 겪으면서 의도한 만큼의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선 노동시간 단축, 후 유연화를 제안할 수 있겠다. OECD 국가 평균 수준으로 근로시간을 줄인다면 근로자는 노동시장 유연화에 저항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미 장시간 일하고 있는데 유연화까지 되면 더 일하라고 할까 봐 반발하는 것이다. 유연성과 안전성을 조화시켜 통합을 추구하는 ‘유연안전성’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또 상생적인 개혁모델이 필요하다. 기업과 노동계가 ‘all or nothing’의 대결구도에 있을 것이 아니라 양쪽의 입장과 형편을 존중하며 상생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사측은 고용 안정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고, 노동계는 노동생산성이나 유연성 측면에서 바꿀 부분이 있다.

유연안전성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은?
본보기로 덴마크 사례를 들 수 있다. 덴마크는 자유로운 해고를 가능케 하며 기업이 바라는 유연성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대신 직전에 받던 임금의 90%를 정부에서 실업급여로 지급하는 안전망을 제공했는데, 정책 시행 초기에는 그 지급기간이 무려 48개월이었다(현재는 24개월). 해고된 사람들이 새로운 직종·산업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을 준 것이다. 또 덴마크는 기술이나 산업 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국가로, 일자리 수요 변화에 맞춰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고 일자리를 매칭하는 역할을 잘한다. 이렇게 유연한 노동시장, 관대한 사회보장제도,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라는 골든 트라이 앵글이 작동하며 덴마크는 또 다른 도약을 만들어냈다.

교수님이 생각하는 좋은 일자리의 조건이 궁금한데.
EU에서 미래 사회에 대한 원칙으로 ‘more and better jobs’ 개념을 선언했다. 일자리에 ‘better’, 즉 질 개념이 들어간다. 일자리의 질 측면에서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고, 임금이 생활을 떠받칠 만큼 충분하고, 작업환경이 안전해야 한다. 또 4대 보험 등 제도화된 안전망과 노동권이 갖춰지면 좋은 일자리라고 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좋은 일자리 창출을 촉진할 방법은?
‘창출’이 새로운 걸 만드는 것일 수 있지만 어떤 퀄리티를 만들어낼 것인가가 가장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한 고용의 안정성, 소득의 문제, 노동조건,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여건을 사회적으로 갖추게 되면 어떤 일자리든 좋은 일자리가 된다. 일자리 양에서는 ‘잡 셰어링’ 개념과 연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 주에 60시간씩 장시간 일하던 것을 40시간으로 줄이면 두 사람 일자리를 세 사람 일자리로 늘릴 수 있지 않나.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유연안전성의 중요한 해법이 셰어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미래 일자리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이제까지는 주로 기술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로 대체되는 식이었는데, 지금 AI 등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에서는 사람이 필요 없어질 수도 있다. 지금의 화두는 ‘지속가능성’이다. 어떻게 일자리를 지킬지 혹은 나눌지에 대해 노사, 정당, 지식인, 언론에서 고민하고 논의할 때다. 양극화라는 당장의 문제를 다투느라 기후위기에 따른 정의로운 전환,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에 대한 화두를 놓치고 있는 것은 매우 큰 문제다.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한 것이 독일 사례다. 독일은 산업개혁인 인더스트리 4.0과 노동개혁인 아르바이트 4.0을 같이 추진했다. 산업, 경제, 기업의 디지털 혁신을 꾀하는 한편 그 충격을 최소화하고 혁신을 능동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노동의 변화도 병행하는 것이다. 한쪽에선 산업만, 한쪽에선 노동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독일처럼 산업과 노동의 상생적인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속 가능한 노동시장을 위해 한 말씀.
연구학기로 덴마크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인상 깊던 기억 중 하나가 30~40대 젊은 직원들이 오후 3시면 모두 퇴근하고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공원에 나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었다. 이런 나라라면 출산에 대한 저항이 없을 것 같았다. 이게 지금까지 말한 근로시간, 소득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또 지금 세대가 출산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다. 사회가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면 미래세대를 낳고 키우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현실 등 현재의 삶에 대한 불안과 여러 어려운 여건들이 맞물려 있는 현 상황을 살펴봐야
할 때다.
 
홍성아 『나라경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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