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업은 저탄소 공정으로의 전환이라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새로운 성장동력과 수익창출 기회까지 만들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기업이 탈탄소 체제로 전환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편익이 커지는 골든크로스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으로 신산업을 창출해 탄소중립을 달성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도 이루는 게임체인저가 돼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 철강업계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에 대응해 수소환원 제철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는 수소로 철을 만드는 탄소감축 기술로, 만약 국내 기업이 이를 상용화할 수 있다면 세계 철강산업의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다.
바이오플라스틱 등 혁신기술 개발하는 기업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 필요
산업의 저탄소화와 경쟁력 향상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서는 기술혁신이 필수다. 우리나라는 현존하는 기술이나 공정을 고려할 때 추가적인 감축이 어려운 상황이다. 산업화 역사가 오래돼 노후설비 교체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유럽, 미국, 일본과는 환경이 다르다.
이에 국내 주요 산업들은 원료와 연료의 대체를 통해 배출량 감축과 자원순환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석유화학산업에서는 석유·납사(naphtha) 기반에서 바이오 납사 혹은 수소 기반 화학산업으로 전환하거나 원유를 뽑아 바로 석유화학 제품을 만들고 있고, 철강산업에서는 철스크랩(쇠 부스러기)을 사용하는 전기로로 전환하고 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은 원료 사용을 효율화하고 불화가스 등 공정 중 발생하는 가스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시멘트산업은 혼합재의 비중을 늘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있다.
그러나 탄소중립은 단순히 연료나 원료, 설비를 바꾸는 것을 넘어 기존의 생산 방식, 제품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대전환을 요구한다. 이는 기존 기술을 넘어선 혁신기술 개발과 시범 적용, 생산설비와 에너지 공급 체계의 변화를 의미하며, 글로벌 대기업조차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이에 유럽과 미국은 10~20년 이상의 장기 프로젝트에 착수해 철강 생산 업체인 아르셀로미탈, 화학 업체인 듀폰, 자동차 제조 업체 메르세데스-벤츠 등의 글로벌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산업 대전환을 전 사회가 지원하는 셈이다.
산업 부문 탄소중립을 위한 혁신기술 개발은 기존의 일반적인 기술개발과 다르다. 따라서 일반 기술개발 프로젝트와 동일하게 기초기술을 개발한 후 시범사업을 위한 소규모예산을 배정하고, 다시 상용화 타당성을 검토한 후 본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현재 선진국은 2030년, 늦어도 2035년까지 혁신적인 공정기술을 적용해 산업의 생산 방식과 설비를 바꾸려 하고 있다. 수소환원과 같은 공정기술은 기술개발 이후 응용기술 개발, 스케일업, 상용화 그리고 본격적인 설비교체가 이뤄져야 한다. 일반적 방식으로 추진해 10년 후 기술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상용화에 뒤처지면 엔지니어링에서 여전히 추격형에 머물 우려가 있다.
주요국들이 기업을 지원하는 이유는 2030년 또는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을 넘어서 글로벌 제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선도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적극적인 세금 감면, 기술개발 지원, 비용 분담을 위한 재정 보조 그리고 고비용 저탄소 제품의 판로 확대를 위한 제도 개편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수소환원 제철, 바이오플라스틱, 온실가스 대체 가스와 같은 혁신적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기술개발과 제품 판매의 불확실성을 낮추고,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은 기업이 혁신적인 공정기술을 개발했음에도 실제 시장 적용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 설비투자 비용뿐 아니라 신재생에너지 사용으로 증가하는 경상운영비까지 보조하는 ‘탄소차액계약제도(CCfD)’를 도입해 지원하고 있다. 또 석유화학, 정유, 시멘트와 같이 원료 특성상 대규모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산업에서는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사업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기업이 CCUS 기술을 활용해 탄소를 포집할 경우 탄소 1톤당 80달러 이상의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산업계 자체의 탄소감축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 탄소중립 위한 제품·솔루션 혁신도 중요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저탄소 제품혁신과 새로운 수요 창출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현재는 온실가스 다배출 산업의 공정 전환을 위한 기술개발이 주로 논의되고 있지만, 건물, 수송, 에너지 등 사회 전 분야의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제품, 솔루션, 서비스가 등장해야 한다. 탄소중립 시대의 경쟁은 기존 방식을 개선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쟁방식을 바꾸면서 새로운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탄소중립을 선도하는 국가들은 탄소중립과 디지털 전환을 통해 글로벌 산업 질서를 재편하려 하고 있다. 우리도 기업이 이에 얼마나 준비됐는지 점검하고, 현장에 맞는 정책을 적극 발굴하고 활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탄소중립 R&D 이니셔티브 추진, ‘탄소중립 산업구조 전환 촉진 특별법’ 제정, 기후혁신기금 마련, 투자 촉진을 위한 녹색금융이나 녹색분류체계(Green Taxonomy) 적용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또한 단기 경쟁력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탄소저감 인센티브 제공, 재생에너지 요금 감면, 탄소차액계약제도 도입, 효과적인 그린뉴딜과 디지털뉴딜 정책 활용도 필요하다.
한편으로, 혁신공공조달 등 수요견인 정책과 연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산업은 그 자체의 탄소감축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의 탄소중립 달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품과 솔루션을 제공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을 만들고 소비자들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 탄소라벨링(제품을 생산부터 소비하기까지 전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이산화탄소 환산량으로 계산해 제품에 표기한 것) 등의 인증 체계도 조기에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저탄소 산업구조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주체들과의 협력과 연대도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집적한 산업단지, 지역사회, 근로자들과의 소통과 협력은 산업 전환의 속도와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주요국은 탄소중립을 글로벌 무역규범으로 재편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EU의 「탄소중립산업법(NZIA)」, 일본의 「탈탄소 성장형 경제구조로의 원활한 이행 및 추진에 관한 법률(GX)」 등을 통해 각국은 철강, 화학, 이차전지, 전기차, 녹색에너지 등 기간산업의 생산 기반을 자국 내에 구축하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산업 부문이 전체 국가 온실가스 배출의 50%를 차지하지만 동시에 경제 성장의 근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산업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으며, 글로벌 경쟁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세계 산업의 전환기에 대응해 우리 기업이 새로운 성장경로에 안착할 수 있도록 전 국가적인 지원과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