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은 미룰 수 없는 역사적 과제다. 이미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고, 2025년 초고령사회에 진입해 2050년경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율이 높은 국가가 되며, 매일매일 856억 원의 연금부채가 쌓이는 심각한 적자연금 구조를 가진 한국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경제성장으로 연금부담을 흡수하기 어려운 상황과 인구고령화 심화로 인한 역피라미드 인구구조에서 연금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더 이상 현세대의 연금부담을 미래세대로 전가하지 않는 것이다.
OECD 국가들은 적자연금 구조를 해소하는 큰 폭의 개혁을 대체로 완수했다. 근로연령층이 노령층을 부양하는 세대 간 부양 방식의 연금은 저성장-고령화 시대에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세대 간 연대 문법을 혁신해야 했다. 각 세대가 노령기에 받을 만큼에 상응하는 부담을 근로기에 지불하거나(확정급여방식), 또는 근로기에 부담한 만큼에 상응하는 급여를 노령기에 받거나(확정갹출방식) 하는 방식으로 결국 급여와 부담을 일치시키는 세대 자립적 연금체계로 개혁했다. 세대 간 연대 문법이 미래세대를 배려하는 방식으로 수정됐다.
미래세대에 감당 불가능한 보험료 부과되지 않도록
적자연금 구조 개혁하는 것이 핵심
국가마다 정치적·역사적 맥락에 따라 연금구조, 연금 보험료율 및 연금급여 수준은 여전히 다양하지만, 보험료율은 급여율에 연동해 약 2분의 1 수준을 보인다. 또한 국가보장 연금급여 수준은 기본보장 수준으로 후퇴하는 한편, 노동 불안정층 증가와 여성의 경제적 취약성을 배려해 연금 취약집단에 대한 기본보장을 강화했다.
선진국 연금개혁의 정치적 과정을 보면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안고 때로는 정권을 내놓는 후폭풍을 감수했지만, 최고 정치 지도자(집단)의 역사적 책임감으로 개혁의 당위성을 설득하고 관철해 냈다. 연금개혁은 세대에 걸친 이해를 반영해야 하므로 롤즈의 무지의 베일(자신의 상황과 조건을 모르는 원초적 입장에서 사회 정의 원칙을 협의) 가정하에 공통의 합의를 이룰 수 있는 비전과 목표를 분명히 했다. 강건한 객관적 사실들을 기초로 합의 가능한 대안범위를 좁혔으며,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해 연금개혁에 대한 이해를 높였고, 가능한 한 탈정치적 맥락에서 연금개혁을 다루고자 했다.
한국이 직면한 연금개혁의 핵심은 미래세대에게 감당 불가능한 보험료 부담이 부과되지 않도록 낸 것보다 많이 받는 현행 적자연금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에서 제시한 개혁안들 중에는 적자연금 구조를 해결하면서 2093년에도 적립기금이 유지되는 지속 가능한 모수개혁 해법이 포함돼 있었다. 바로 급여율 40%, 보험료율 15%, 2048년까지 연금수급연령 68세로 인상, 기금운용수익률 1%p 제고(5.5%)의 개혁 조합이다. 재정계산위원회 개혁안의 핵심 메시지는 보험료율 인상으로 적립기금을 계속 유지해 기금운용수익을 연금보험료 수입과 함께 연금재정의 두 축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선진국보다 낮은 보험료 부담으로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연금개혁 해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은 세계 유례없는 고령화에 따른 부담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미 적립기금이 고갈돼 부과방식(적립기금 없이 매해 보험료 수입으로 연금급여 충당)으로 전환된 상태에서 연금개혁을 수행한 선진국과 달리 적립기금을 유지한 상태에서 기금운용수익을 연금재정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역피라미드 인구구조의 영향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세부적 이견에 집중하기보다는
연금개혁의 큰 그림에 착목할 때
이번 정부의 연금개혁안은 연금개혁 공론화 논의를 반영해 보험료율 인상수준을 13%로 제안했다. 보험료율의 빠른 인상이 적자연금 구조 개선에 핵심이다. 보험료율 인상이 빨리 되지 않으면 급여지출을 보험료 수입으로 충당하지 못해 적립기금에서 지출하는 시점이 앞당겨지고, 기금운용수익을 통한 연금재정 기여에 차질을 빚게 돼 결국 보험료율 인상부담이 더욱 커져야 한다.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개혁의 난도는 곱으로 높아진다는 의미다. 또한 개혁이 지연된 만큼 베이비붐 장년세대의 연금보험료 인상 속도를 좀 더 빠르게 차등화한 방안은 그 취지의 합리성을 반영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금개혁의 ‘자동조정장치’는 선진국에서는 급여-부담을 일치시키는 연금개혁을 완수한 이후 예측하지 못한 인구-경제 변동을 반영한 미세조정을 통해 지속 가능한 균형을 탈정치적으로 자동 확보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이번 정부의 자동조정장치안은 연금개혁이 완수되지 않은 만큼 급여-부담 불균형을 연금액에 직접 연동하지 않고, 매년 연금액 인상률 결정에 반영하고 있는 물가상승률에만 가입자 수 증감률과 기대여명 증감률을 연계하겠다는 안이다. 그럼에도 연금급여율의 삭감 정도가 상당한 것으로 예측돼 비판의 표적이 됐다. 자동조정장치는 예측하지 못한 인구-경제 변동의 위험부담을 연금가입자와 연금수급자가 함께 지는 세대공생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어서 그 취지는 합리적이다. 개혁논의에서 크게 논란이 된 것과는 달리, 자동조정장치의 조정폭은 아주 제한적이어야 하는 만큼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구조개혁 논의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노후소득보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뿐만 아니라 기초연금, 퇴직연금 등을 포함하는 다층연금체계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는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의 공론화 논의를 반영해 국민연금급여율을 2%p 인상한 42%로 제안했다. 지난 국회 논의에서 합의수준에 도달한 44%를 최대치로 해 국민연금 급여율 개혁안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과 노인빈곤율 감소는 직접적으로 대응되는 대책은 아니므로, 소득대체율 관련 이견은 다층노후보장체계의 구조개혁 논의와 함께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노인빈곤 해소를 위해서는 국민연금 포괄범위 확대 및 짧은 가입기간 확대를 지원하는 데 집중하는 한편, 기초연금 수급범위를 좀 더 표적화하고 취약층에게 더 두텁게 급여를 보장하는 개혁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연금개혁 논의가 22대 국회에서 답보상태에 있다. 2024년 9월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제출한 이후에도 각론에 매몰된 비판들만 무성하고, 논의 테이블조차 마련되지 않았다. 지금은 세부적 이견에 집중하기보다는 연금개혁의 큰 그림, 숲에 착목(着目)할 때다. 저성장 시대의 가파른 고령화 파고를 견뎌낼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연금으로 개혁해야 한다. 청년세대의 연금불신과 불안을 해소하고 노후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 연금개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