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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자
서동규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2025년 06월호
청년가구 81.1%가 세입자로 ‘청년 주거 문제’는 곧 ‘세입자 주거 문제’…세입자 권리가 취약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고쳐야 청년 주거 안정을 이룰 수 있어

“돈 많은 시민만 살 수 있는 나라입니까? 저도 잘 살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5월 세상을 떠난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남긴 유서의 일부분이다. 지난 5월 2일 열린 그의 1주기 추모제에서는 구미 지역의 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단순히 집 한 채를 잃은 것이 아니라 청춘을 잃었고, 꿈을 잃었고, 사람을 믿는 마음마저 잃었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는 전세사기라는 재난적 상황을 겪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3년 6월 1일부터 올해 5월 1일까지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이하 「전세사기피해자법」)에 의해 ‘전세사기피해자등’으로 인정된 피해 건수는 총 2만9,540건에 달한다. 「전세사기피해자법」에서 피해자를 인정하는 기준이 엄격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피해와 피해 인정 신청조차 하지 못한 사례들까지 감안하면 피해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예측된다.

보증금은 단순히 돈 몇 푼이 아니다. 당장 살아갈 집을 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금이자 지금까지 일하면서 모아온 피땀이며 대출로 저당 잡힌 미래의 소득이다. 약 2~3년 동안 수만 명에 이르는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도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해 달라는 피해 인정 신청 건수가 줄지 않고 있다. 「전세사기피해자법」 시행 이래 올 4월까지 월평균 약 2천 건씩 꾸준히 피해자 접수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서울시 동작구, 경상북도 구미시, 대구시 달서구, 경기도 수원시, 제주도 서귀포시 등에서 새로운 대규모 피해가 보도됐다. 「전세사기피해자법」이 시행된 지 2년 가까이 됐지만 아직 세입자가 보증금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세입자로 살고 있기 때문에 불안한, 다시 말해 주택 소유권이 없다는 이유로 미래와 생명이 뒤흔들릴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사회다.

2년간 인정 피해 약 3만 건 중 75%가 청년 대상···
청년 주거정책 통해 보증금 마련한 피해자 많아

청년 세입자 단체의 활동가로서 더더욱 참담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또 있다. 언급한 전세사기 피해가 2030 청년층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공식 피해 중 피해자가 만 40세 미만 청년인 건수가 2만2,154건으로, 그 비율이 75%에 달한다. 여기에 청년 주거정책을 통해 보증금을 마련한 전세사기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현장에서 주거 상담을 하다 보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거나 돌려받지 못할 위험에 처한 청년은 대부분이 전세자금 대출을 이용하고 있었다.

한 피해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면 이렇다. 첫 직장을 구했지만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하기가 매우 힘들었고, 최저임금 언저리를 받는 상황에서 서울 월세는 너무 비쌌다. 주거비 지출이라도 줄이고자 청년 보증금 대출을 이용해 다섯 평 남짓 되는 원룸을 전세 1억 원에 구했다. 일을 하며 모은 돈 2천만 원에 대출받은 8천만 원을 더해 전세자금을 마련했다. 높은 대출 비중 등 위험 요소가 있었지만 국가 인증 자격증을 가진 공인중개사를 믿었다. 그러나 임대인의 가족인 공인중개사는 이미 보증금 반환 여력이 없었던 임대인의 재정 상황을 숨기고 계속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건물 가액과 선순위보증금 등을 속이기도 했다. 그간 세입자의 보증금을 손쉽게 동원할 투기자금으로 여겼던 임대인이 결국 파산을 신청하자 모든 책임은 세입자들에게 돌아갔다. 임대인·중개인이 75명의 세입자를 기망하고 정책 통로로서 전세자금 대출을 심사한 은행이 이자를 챙기고 정부가 정책으로 생색내는 사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세입자만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적도 없는 보증금 대출을 갚아야 할 처지로 내몰렸다.

전세사기는 세입자의 부주의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건축물대장, 등기부등본 같은 서류들도 확인했고 적법하고 정상적인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상식적인 절차를 다 따랐음에도 전세사기를 피할 수 없었다. 전세사기 피해 청년들이 대단히 사치스러운 주거지를 구한 것도 아니다. 집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삶을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뿐이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과정조차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어떤 아름다운 미래를 그릴 수 있을까. 


법의 사각지대 해소, 전세 보증금 규제 강화, 
표준계약서 의무화 등으로 세입자 권리 강화해야
 
청년가구 중 81.1%가 세입자로 살고 있다. 그래서 ‘청년 주거 문제’는 곧 ‘세입자 주거 문제’다. 세입자의 권리가 취약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결함을 고쳐야 청년 주거 안정을 이룰 수 있다. 전세사기를 근절하고 세입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전세사기 피해 복구를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전세사기피해자법」에 아직 사각지대가 너무 많고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해당 법에 따른 구제를 받기 위해서는 계약시점에 임대인에게 보증금 반환 불이행 의도가 있었음을 피해자가 증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삭제해 억울하게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없게 해야 한다. 

둘째, 보증금 관련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지금까지 보증금은 임대인 마음대로 받아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일종의 사금융으로 통용됐다. 보증금 상한액을 주택 가격 및 근저당권 규모와 연동하는 등 보증금에 대한 사회적인 통제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주택임대차시장을 중앙·지방 정부가 적극적으로 감독해야 한다. 주택임대차 감독 행정을 대폭 강화하고 표준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해 세입자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감독을 위해 모든 임대주택에 등록 의무를 부여할 필요도 있다.

‘집을 소유하지 않으면 탈락하는’ 한국 사회에서 세입자는 보증금을 약탈당하기 쉬우며,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시작되면 쫓겨나는 등 지역에 뿌리를 내리기도 어렵다. 정부는 대량 주택공급과 ‘빚내서 집 사라’는 정책을 오랫동안 펼쳐왔지만 주거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자. 청년에겐 세입자로도 한 동네에서 오래 살 수 있는 집, 보증금을 떼일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필요하다. “집 없으면 못 사는데, 집 때문에 못살겠다”라는 한탄이 더 이상 이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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