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는 민간 기업도 미국 국채나 달러를 담보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되 발행량은 담보자산 범위 내로 제한하는 정책 방향을 제시했는데, 이는 달러를 위협하는 ‘대안 통화’로서의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달러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도구’로서의 스테이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은 ‘가치가 고정된 코인’이라는 뜻으로, ‘stable(안정된)’과 ‘coin(화폐)’의 합성어다. 영어 단어 두 개가 합쳐진 이 말은 2013년께부터 하나의 단어로 쓰이다가 2023년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단일 단어로 정식 등재되며 디지털 자산 분야에서 하나의 보통명사가 됐다. 가격 변동성이 극심한 암호화폐시장에서 상대적인 안정성을 제공하고자 태어난 이 개념은, 이제 세계 금융 질서를 둘러싼 전략적 수단으로까지 부상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지난 대선 TV 토론에서 후보들이 스테이블코인을 놓고 공방을 벌이는 등 최근 들어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빅카인즈 검색 결과, 2024년 한 해 동안 스테이블코인을 다룬 국내 언론 기사는 583건이었으나 2025년 6월 한 달 동안에만 1,361건이 쏟아졌다. 이처럼 스테이블코인이 언론과 정책 영역의 중심에 오른 결정적 계기는 바로 트럼프 대통령의 귀환, 즉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이었다.
‘반코인’에서 ‘친코인’으로, 트럼프의 변신
트럼프는 원래 반(反)코인 인사였다. 2021년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법정통화로 지정했을 때 그는 “비트코인은 사기 같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페이스북이 추진하던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 리브라(Libra)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반대로 좌초됐다. 그러나 3년 뒤 그는 아들과 함께 코인 기업을 세우고 직접 암호화폐를 발행하며 친(親)코인 노선을 선명하게 택했다. 이후 대선에서 트럼프는 두 가지 핵심 약속을 내세웠다. 하나는 비트코인을 미국의 전략 비축 자산으로 삼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트럼프가 스테이블코인에 주목한 이유는 분명하다. 과거에는 암호화폐가 달러 패권에 도전하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를 활용해 달러의 지위를 강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민간 기업도 미국 국채나 달러를 담보로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되, 발행량은 담보자산 범위 내로 제한하는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달러를 위협하는 ‘대안 통화’로서가 아니라 달러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도구’로서의 스테이블코인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책 방향을 투사하듯이 미국의 양대 유통 대기업 아마존과 월마트가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시장의 반응은 빠르고, 그 확산 속도도 놀랍다. 2025년 7월 기준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약 2,585억 달러(약 352조 원)로, 5년 전보다 22배 이상 커졌다. 그중 99.7%가 달러에 연동된 형태다.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점유율이 압도적인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본래 코인 거래소에서 암호화폐 간 환전을 쉽게 하기 위한 ‘디지털 머니’로 태어났고, 글로벌 거래소 대부분이 달러를 기준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자국 통화를 먼저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한 뒤 거래에 나서며, 이때 선택지는 대개 달러 기반에 집중된다. 스테이블코인으로 미국의 달러 영토가 확대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미국 외 다른 대부분의 국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무역과 결제, 송금, 여행 등 실물경제 영역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면, 자국 통화의 사용 기반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일부 중국, 러시아 무역상들이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한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 이미 7~8년 전이다. 최근에는 한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이나 동대문 도매시장의 거래대금으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한다는 보도가 등장했다. 충전된 스테이블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는 체크카드도 이미 국내에 출시됐다.
미국의 글로벌 민간 기업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이 유통되기 시작하면 그 영향력은 실물경제와 외환시장 구조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기존 금융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변화다.
기존 금융 프레임 넘어서는 상상력 필요한 시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답이 될 수 있을까
특히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전통적인 통화정책 수단의 효과를 제한할 가능성도 내포한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조정하더라도 시중금리나 통화량 조절에 미치는 영향이 약화될 수 있다. 자국 통화에 대한 신뢰가 낮은 나라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사실상 외화인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정책당국의 관리 능력을 벗어나는 자금 흐름을 형성하면서 통화주권을 흔들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하자는 주장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목적은 세 가지다. 첫째, 국내시장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영향력을 제어하고 통화주권을 지키는 것이다. 둘째, 한국 기업의 해외진출 과정에서 원화를 결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넓히는 것이다. 셋째, 블록체인 기반 지급결제 인프라를 구축해 금융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만 스테이블코인의 화폐적 성격을 고려할 때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은 민간 발행에 따른 부작용, 예컨대 통화정책 유효성 약화나 금융 불안정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친코인 전환’은 처음엔 미국 내부 정치의 돌발 변수처럼 보였지만, 이제 그 파급력은 세계적이다. 이 흐름이 일시적일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달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21세기형 도구로 기능하고 있으며, 암호화폐와 법정화폐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 변화의 흐름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지정학적·정책적·기술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글로벌 경쟁이 본격화된 지금, 이를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디지털 자산의 미래를 가늠할 중요한 단서가 바로 이 새로운 형태의 통화, 스테이블코인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기존의 금융 프레임을 넘어서는 상상력과 전략이 필요한 시대다. 이제는 스테이블코인을 ‘기술’이 아니라 ‘정책’으로, ‘시장 흐름’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