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시장은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블록체인과 빠르게 융합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규제 개혁이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당일 증권거래위원회(SEC)에 크립토 태스크포스를 설립했다. 또 불과 이틀 후에는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를 금지하면서 스테이블코인을 지원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는 등 빠르고 강력한 친크립토(pro-crypto) 정책을 펴고 있다. 이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미국의 트리핀 딜레마(달러 가치 안정과 유동성의 확대는 양립할 수 없음)와 국채 수요 창출이라는 두 가지 난제 해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기관과 업체들도 스테이블코인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국채토큰 비들(BUIDL)을 발행하며 ‘모든 것의 토큰화’를 추진하고 있고, 토큰증권을 포함한 다양한 토큰화 자산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거래될 것으로 예상된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 JP모건, 씨티은행 등 주요 은행들도 컨소시엄을 구성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선언했다. 페이팔과 가상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는 AI 에이전트와 스테이블코인의 강결합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현재 2,300억 달러 규모인 달러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이 2028년 2조 달러 규모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미 블록체인 업계 다시 활성화···
인스타, 유튜브처럼 일상생활에 빠르게 침투할 수 있어
이처럼 바이든 정권에서 사실상 활동이 멈춰 있던 미국 블록체인 업계가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이들이 규제 명확성과 제도권 금융기관과의 협업에 힘입어 대거 출시할 서비스들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같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할 수 있다. 해당 서비스가 우리 시장에 들어올 경우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가상자산 거래소를 넘어 전 국민의 일상생활에 빠르게 침투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개인 간 거래, 소규모 상거래에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사용되기 시작하면 원화의 통화주권이 위험하다. 이에 대한 대비로 원화 스테이블코인과 이를 활용한 탈중앙화 금융(DeFi) 생태계 구축이 시급한 것이다.
이처럼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은 단순한 기술 실험을 넘어선 전략적 과제다. 우리나라에서 발행하지 않으면 해외에서 언제든 만들어질 수 있고, USDT의 선례처럼 한번 선점된 시장은 되찾기 어렵다. 또한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탈중앙화 금융에서 유통되면 달러 또는 유로 스테이블코인과 원화 스테이블코인 간 새로운 환율이 형성되는데, 이러한 ‘스테이블코인 환율’의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서도 우리 법과 금융당국의 통제하에 있는 국내 금융기관이나 업체가 신속히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
한국은행을 비롯한 정책당국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가장 큰 우려는 금융 안정성 훼손과 통화정책의 유효성 약화다. 다수의 비은행 기관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경우 19세기 민간 화폐 난립과 유사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고, 이는 ‘코인런’ 등 다양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신용카드, 간편결제, 페이 서비스 등 지급결제 인프라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단순히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한다고 해서 실물 소매경제에서 기존 결제망과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입 초기 시장에서의 실질적 수요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스테이블코인의 수요는 기본적으로 온체인(on-chain) 경제, 즉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발생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대비나 계획 없이 여러 업체가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남발하면 다수의 스테이블코인이 불안정하게 운영될 가능성이 있다.
코인런에 대한 우려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유럽은 이미 「암호자산시장법(MiCA)」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은 발행량과 같은 규모 이상의 현금성 자산을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한다는 규정을 시행했고, 올 7월 미국에서 통과된 「지니어스법(GENIUS Act)」에도 해당 조항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법적 의무를 부과하면 코인런이 발생하더라도 전액 현금 또는 현금성 자산으로 환매가 가능하다. 시장에 혼란을 일으켰던 2023년 USDC의 디페깅(기준 통화와 1:1 가치 연동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사태는 USDC 준비금의 일부가 보관돼 있던 실리콘밸리은행에서 뱅크런이 발생해 패닉셀(공황매도)을 불러일으킨 것일 뿐 USDC 자체의 코인런은 아니었다.
새로운 시스템인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기술적 오류가 발생해 피해자가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스테이블코인과 기술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스테이블코인이 유통돼 온 지난 10년간 규모 있는 스테이블코인 운영에 심각한 기술적 오류가 발생한 이력은 담보자산 없이 운영된 루나·테라를 제외하고는 찾기 어렵다.
자금세탁 악용 우려의 경우에도 국제적으로 디지털자산을 이용한 자금세탁 규모는 현금에 비해 매우 적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는 글로벌 자금세탁 규모를 연간 8천억~2조 달러로 추정하는데, 블록체인 분석 전문회사 체이널리시스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자금세탁에 동원된 디지털 자산 규모는 약 222억 달러에 불과했다. 자금세탁은 현금이든 귀금속이든 디지털 자산이든 범죄방식에 맞게 차단해야 하는 범죄일 뿐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금지할 명분은 아니다.
자본의 국외 유출을 걱정하는 시선도 있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서는 USDT 등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원화로 쉽게 매매할 수 있다. 즉 원화 스테이블코인 없이도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 국내외를 오간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유출·유입 규모는 각각 약 35조3천억 원으로 동일한 수준이며, 이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자본의 국외 유출이 현재도 가능하나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내수시장 빼앗기지 않도록 신속한 도입 필요하지만
안정된 운영 위해 안전장치와 규제도 필수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논의는 신속함과 신중함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내수시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신속한 도입이 필요하지만, 안정된 운영을 위해서는 안전장치와 규제도 필수다. 실질적 수요와 가치 제안이 없는 공급 확대는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허용 여부에 대한 지난한 논의보다는 각계에서 제기되는 우려와 제안을 종합해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관, 업체, 또는 컨소시엄에 발행을 허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허용 여부나 인가 조건, 미래 활용 양태에 대해 고민하는 이해당사자 대부분은 기존 법령과 시장의 변화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외국환거래법」, 「대외무역법」,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전자금융거래법」 등 많은 법령과 접점이 발생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우리가 하지 않으면 해외에서 할 것이며, 이는 곧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유통과 역외 외환시장의 발생이 불가피한 미래라는 뜻이다. 기술과 시장의 변화에 따라 관계 법령을 개정하고 현행 지급결제 시스템 관련 규정들을 통합하는 등 글로벌 정합성에 맞는 법체계 확립이 필요하다.
위정척사를 논하다가 골든타임을 빼앗겨 버린 구한말의 아픔을 기억할 것이다. 달러가 블록체인을 타고 통상을 요구하고 있는 지금 그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