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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디지털 세계에서 원화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
박혜진 서강대 AI·SW 융합대학원 교수 2025년 08월호
2025년 여름 대한민국은 정치적 전환과 더불어 스테이블코인이라는 거대한 금융 어젠다를 마주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재집권으로 국제경제 질서의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조기 대선을 통해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한 디지털 자산의 한 종류를 넘어 국가 통화정책과 금융 경쟁력의 핵심 전략자산으로 격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에서 수동적 규제자가 아닌 전략적 선도국으로서의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이는 법률 제정 문제를 넘어 원화의 국제적 위상과 디지털경제에서의 주도권 확보라는 국가적 전략과 직결된다.

이미 시작된 디지털 자산 생태계의 다극화···
규제 수용국에서 디지털 화폐 전략국으로 전환할 시점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디지털 자산시장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고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한 포괄적인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는 민간의 발행과 시장 참여를 적극적으로 허용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 이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기존 금융의 하위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토양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최근 미국에서 발효된 「지니어스법(GENIUS Act)」과 유사한 기조를 띤다. 즉 발행 주체의 건전성 확보, 준비금의 투명성, 이용자 보호를 핵심 원칙으로 삼으면서 민간 주도의 자율성과 역동성을 존중하려는 글로벌 규제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을 통화정책을 위협할 수 있는 대체 화폐로 간주하고 있으며, 그 무분별한 확산이 통화정책의 유효성 약화 및 금융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거듭 표명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발행 주체를 한국은행이 통제 가능한 대형 상업은행으로 한정하려는 정책적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처럼 민간 주도의 혁신을 지지하는 입법 방향과 중앙은행의 통제 전략이 충돌하는 지점이 현재 한국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긴장 축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글로벌 스테이블코인시장은 달러 기반의 USDT, USDC가 독과점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영향력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과 달러의 일극체제가 영속할 것이라는 가정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이기도 하다. 디지털 자산 생태계의 다극화는 이미 시작됐다.

모든 탈중앙화 방식의 디지털 자산을 엄격하게 금지해 온 중국의 경우 최근 인민은행 총재가 직접 나서 위안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달러 패권 공고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한발 앞서 은행과 신탁사를 통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법제화하며 엔화 기반 생태계 구축을 시도했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디지털 자산 허브로서 토큰화된 자산 및 결제 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EU의 「암호자산시장법(MiCA)」은 역내 스테이블코인시장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며 주권을 강화한다. 중동 국가들 또한 자체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및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미래 디지털 금융시장이 특정 통화의 독점이 아닌, 여러 주요 통화를 기반으로 하는 스테이블코인들이 경쟁하고 연결되는 다극화된 형태로 진화할 것임을 시사한다. 한국도 이제는 규제 수용국에서 디지털 화폐 전략국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실질 수요 있는 동남아 등에 결제 네트워크 구축하고
준비금 투명성에 초점 맞춘 실효적 규제체계 수립을


이를 위해서는 첫째,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단순한 ‘국내 결제 수단’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한류 콘텐츠, 전자상거래, 무역, 해외 송금 등 실질적인 수요가 존재하는 동남아 및 신흥국 시장을 대상으로 원화 기반 디지털 결제 네트워크를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정부는 정책금융, 한국수출입은행, 코트라 등과 연계해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과 함께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결제 활용을 장려할 수 있다. 이는 무역 기반 디지털 원화 수요 창출이라는 실질적 효과를 거둘 뿐만 아니라 원화의 국제통화 지위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는 전략적 수단이 될 것이다.

둘째, 진정한 금융 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 주체 다변화가 필요하다. 스테이블코인은 탈중앙 프로토콜, API 기반 금융서비스, 분산신원증명(DID)과 같은 신기술이나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 기반의 자율적 시스템들과 결합할 때 진정한 혁신이 실현된다. 그러나 대형 은행 중심의 발행 구조는 수수료 기반 수익모델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 혁신을 제한할 수 있다.

따라서 엄격한 준비금 규제와 리스크 관리체계 아래 핀테크, 블록체인 스타트업, 금융 플랫폼 기업 등 비은행권 주체들의 시장 진입을 허용해야 한다. 이는 디지털 금융시장의 경쟁과 다양성을 높이고, 전통 금융과 디지털 자산의 융합 혁신을 유도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의 초점을 ‘자본금’에서 ‘준비금의 투명성 및 관리 방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현재 국내 스테이블코인 관련 논의는 발행사의 자본금 규모에 과도하게 치우친 경향이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신뢰는 ‘자본금의 크기’가 아닌, 발행된 코인에 상응하는 준비금의 투명성, 유동성, 실시간 공개 여부에 달려 있다. USDC를 발행하는 미국의 써클은 준비금 상태를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신뢰를 구축했고, 유럽 「암호자산시장법」은 준비금 관리 방식에 대한 외부 감시 및 리스크 평가 시스템을 법제화하고 있다. 한국도 자본금 요건에만 집중하는 관성적 규제에서 벗어나 회계 투명성, 감사체계, 비상시 환급 가능성 등에 초점을 맞춘 실효적이고 유연한 규제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의 진정한 효용은 단지 국경을 넘나드는 지급결제의 효율성과 편의성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시작점일 뿐이다. 디지털 자산 시대의 스테이블코인은 ‘프로그래머블 금융(PF; Programmable Finance)’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핵심 인프라로서 잠재력을 지닌다. 특히 AI 기반 에이전트와 사물인터넷(IoT)이 결합되는 머신투머신(M2M) 경제의 도래는,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실시간 자동화 결제 시스템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가치 저장이나 환전 수단으로서의 화폐가 아닌, 계약 조건에 따라 자동 실행할 수 있는 ‘프로그래머블 화폐’다. 그리고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그 역할을 수행하는 가장 유력한 형태가 될 수 있다.

한국이 이러한 미래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부터 스테이블코인을 정책적으로 수용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며, 실사용 기반의 경험치를 축적해 나가야 한다. 규제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통화 주권을 재정의하고 글로벌 금융 생태계에서 전략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플랫폼 자산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서 원화를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시작되는 이 여정이, 원화를 국내 통화의 틀을 넘어 글로벌 디지털경제에서 능동적으로 활용되는 확장된 통화로 전환하는 담대한 첫걸음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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