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 예방 민관협의회 출범, 플랫폼 종사자 보호대책 논의기구 운영 등 다양한 협의구조를 시도하고 있지만, 이러한 논의가 일회성 자문이나 시범사업에 머문다면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워. 산업구조와 노동형태가 급변하는 현실에서 협의체는 단순한 논의 창구를 넘어 정책 설계·평가·이행을 함께 수행하는 상설 거버넌스로 발전해야.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24년 한 해 동안 약 800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그 죽음의 구조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50인 미만 중소사업장 노동자, 하청노동자, 비정규직, 이주노동자이며, 최근에는 배달·물류 등 플랫폼 노동자의 사망이 급증하고 있다. 2023년 플랫폼 종사자의 산재 사망은 전년 대비 18% 증가했으며, 상당수가 교통사고와 장시간·야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였다. 그러나 이들은 법적으로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산업안전보건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산재보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농어업 부문의 ‘일터에서의 사망’ 역시 심각하다. 2023년 해상조업 중 사망·실종된 어선원은 150명, 농작업 재해사망자는 350명을 넘었다. 이들의 죽음 역시 산재 예방·보상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원청 책임 조항 강화하고
부처 공동으로 산재 조사·예방·보상 정책 설계할 필요
이러한 비극을 멈추려면 무엇보다 구조적으로 기업이 위험을 하청기업과 개인에게 전가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경영의 기본 원칙이어야 한다. 원청기업은 위험의 외주화를 멈추고, 협력업체와 플랫폼 종사자를 포함한 전체 공급망의 안전관리 책임을 져야 한다. 이를 위해 하청의 위험성평가 결과를 직접 확인하고 개선조치 이행을 의무화하도록,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원청 책임 조항을 강화해야 한다. 원청이 실질적 안전관리 주체로 작동하도록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독일의 「공급망 실사법」처럼 인권·환경뿐 아니라 산업안전보건 위험까지 공급망 관리의 범위에 포함하는 것은 국제적 추세이며, 한국도 이에 부합하는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정부는 산업안전의 최종 책임자이자 제도 설계자로서 산업구조 변화와 새로운 노동형태에 대응하는 포괄적 안전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의 적용 대상을 확대해 플랫폼 노동자, 농어민, 어선원 등 비정형 고용노동자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고, 50인 미만 사업장과 하청·플랫폼 업종을 대상으로 예방 중심의 근로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부처 간 협업을 통해 각 업종 산재의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기반으로 실질적 대책을 세우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건설·해양·농업·물류 등 산업별로 분절된 관리체계를 통합해 고용노동부·해양수산부·농림축산식품부·국토교통부가 공동으로 조사·예방·보상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 산업별 칸막이를 넘어서는 국가 단위의 산업안전망이 완성될 수 있다.
또한 현재의 단기적 기술·장비 지원 중심 사업을 넘어, 핀란드처럼 지방정부·보험기관·사업주가 함께 운영하는 지역 직업건강안전센터(Local OHS Hub)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상시 기술지도·컨설팅·교육을 결합한 체계로 전환할 때 정책의 지속성과 행정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시민사회는 산업안전의 최종 감시자···
노사정 협의체 통해 노동자도 정책결정에 참여해야
노동자는 산업안전의 수동적 보호대상이 아니라 예방 주체다. 산업안전보건위원회의 원청·하청 통합 구성, 하청노동자의 참여 확대, 작업중지권 강화는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발언권과 활동시간이 제대로 보장돼야 노동자가 위험성평가·재해조사·작업공정 개선 과정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사업장 수준에서뿐 아니라 국가 단위의 노사정 협의체를 통해 정책결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핀란드와 독일처럼 노사정이 산업안전정책을 공동으로 설계·평가하는 구조는 예방 중심의 거버넌스를 만드는 핵심 모델이다.
시민사회는 산업안전의 최종 감시자이자 사회적 안전망의 중심축이다. 중대재해 발생 기업의 명칭과 사고원인, 재발방지 현황은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며, 정부는 사고 직후 공공안전 목적에 따라 기업명과 사고 개요를 신속히 공개해야 한다. 재해조사보고서와 산업별 위험지도를 통합한 공공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해 시민과 언론, 학계가 이를 분석하고 재해 다발 기업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국민 모두가 ‘일터의 안전이 곧 사회의 안전’임을 인식하고,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을 공동체의 기본 가치로 여길 때 산업안전은 제도를 넘어 문화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무겁다.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본부라는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한 작은 조직으로 방대한 산업안전 행정을 감당하려 하고 있으며, 이는 구조적 위험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 예방 민관협의회를 공식 출범시키고 플랫폼 종사자 보호대책 논의기구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협의구조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가 일회성 자문이나 시범사업에 머문다면 실질적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산업구조와 노동형태가 급변하는 현실에서, 협의체는 단순한 논의 창구를 넘어 정책 설계·평가·이행을 함께 수행하는 상설 거버넌스로 발전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국가 산업안전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이다. 정부는 산업안전 행정의 위상을 높이고, 부처 간 협업과 정책 조정을 총괄할 수 있는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중장기 로드맵을 통해 제도의 지속 가능한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각 부문이 책임을 다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정부의 철저한 책임의식과 중단 없는 개혁 의지 그리고 노동자와 시민사회의 실질적 참여가 맞물릴 때, 비로소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는 구호가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