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이 지난 2월 8일 치러진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뒀다. 단일 정당으로는 전후(戰後) 처음으로 중의원 465석의 3분의 2인 개헌 발의선 310석을 넘는 316석을 확보했다. ‘강한 일본’을 내건 다카이치 총리가 자민당을 떠난 보수층 표심을 되돌렸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후 처음으로 개헌 발의선 단독 확보한 다카이치의 자민당…
사나에노믹스의 핵심은 책임 있는 적극 재정과 위기관리·성장 투자
이날 선거로 일본에서는 ‘다카이치 1강’ 시대가 열렸다. 다카이치 총리는 같은 달 18일 열린 특별국회 총리 지명 선거에서 354표를 얻어 제105대 총리로 재선출됐다. 다카이치 총리가 재선출되면서 출범한 다카이치 2기 내각은 강력한 정권을 기반으로 재정 확장 등 ‘사나에노믹스(Sanaenomics)’와 매파적 외교·안보 정책을 펼칠 것으로 전망된다.
다카이치표 경제정책인 사나에노믹스의 핵심은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이다. 정부 지출로 민간 투자를 촉진해 일본경제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배경에는 재정 지출로 수요가 공급을 지속적으로 웃돌면 장기 성장률도 높아진다는 ‘고압 경제’가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2월 20일 특별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경제성장을 실현하기 위해 재정 투입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카이치 내각은 올해 예산안을 사상 최대인 122조3,092억 엔으로 편성했다.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을 뒷받침하는 것은 ‘위기관리·성장 투자’다. 다카이치 총리는 3월 10일 일본성장전략회의를 열어 ‘위기관리·성장 투자 로드맵’ 초안을 제시했다. 로드맵에는 2020년 5조 엔 규모였던 일본산 반도체 매출을 2040년 40조 엔으로 늘리고 세계시장에서 미국과 중국에 버금가는 30% 이상의 점유율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담았다. 1980년대 세계를 석권했던 일본 반도체를 부활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일본 정부는 피지컬 AI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를 중점 지원하고, 아울러 AI와 데이터센터 수요 확대에 대응해 최첨단 반도체 연구개발(R&D) 거점을 마련할 방침이다. 차세대 자율주행차 등에 사용되는 반도체를 저렴하게 공급하겠다는 구상도 담았다. 반도체 공장 신설·확장에 필요한 산업용지 취득 지원, 물·전력 등 인프라 정비 또한 포함한다.
그간 일본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의 구마모토 공장, 소니·도요타·키옥시아 등 자국 ‘반도체 연합군’이 설립한 라피더스의 홋카이도 공장을 중심으로 반도체에 투자해 왔다. 2024년 ‘AI·반도체 산업 기반 강화 프레임’을 수립하고 7년간 10조 엔 이상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TSMC는 구마모토 공장에서 일본 내 최초로 3나노(1나노=10억 분의 1미터) 반도체를 양산하기로 했다. 당초 통신기기 등에 쓰이는 6나노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었지만, AI 반도체 수요가 늘자 더 미세한 고성능 제품을 제조하기로 방향을 바꿨다. 일본 내 제조 거점이 없었던 3나노 반도체는 AI 데이터센터 등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올해 총 2,500억 엔을 출자한다. 소프트뱅크, 소니 그룹 등 일본 대표 기업 32곳이 총 1,676억 엔을 출자하기로 했다. 자본력을 확충한 라피더스는 내년 2나노 반도체 양산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캐논을 첫 고객 후보로 확보한 라피더스는 캐논과 2나노 이미지 처리용 반도체를 공동개발할 계획이다.
시장에서는 재정 확장 중심의 사나에노믹스가 ‘다카이치 트레이드’를 가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온다. 주가는 상승하고, 엔저와 국채값 하락이 지속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현지에선 다카이치 내각의 ‘돈 풀기’가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물가 상승 국면에서 재정 지출을 늘리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가속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카이치 내각은 현행 8%인 식료품 소비세율을 2년간 0%로 낮추는 방안도 추진한다. 이로 인해 연간 5조 엔가량 세수에 구멍이 생길 것이란 추산도 나온다. 다카이치 총리는 ‘적자 국채’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사회보장제 핵심 재원인 소비세 감세분을 어떻게 메울지가 관건이다. 영국에서는 2022년 당시 리즈 트러스 총리가 내놓은 ‘재원 대책 없는 감세’에 주가, 국채 가격, 통화 가치가 동반 하락하기도 했다. 에버코어ISI의 크리슈나 구하 부회장은 “일본판 ‘트러스 쇼크’가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 지출에 따른 인플레이션과 소비세 감세분 공백 우려…
한일 관계는 기존 협력 기조 이어갈 전망
자민당이 중의원 개헌 발의선 이상을 확보하면서 개헌 논의도 본격화하고 있다. 핵심은 ‘전쟁 포기 조항’인 「헌법」 9조다. 일본 자위대는 공격받았을 때만 자위력을 행사하는 ‘전수 방위’ 목적의 조직이지만 실질적인 군대여서 「헌법」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개헌이 이뤄지면 일본은 종전 80여 년 만에 사실상 전쟁 가능 국가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개헌안을 발의하려면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각각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현재 참의원은 여소야대 국면이며 다음 선거는 2028년 치러질 예정이다. 의회 통과 후에는 국민투표에서 과반 찬성을 얻어야 한다. 다카이치 총리는 “조금이라도 빨리 국민투표가 실시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다카이치 정권은 ‘군사 대국화’를 위해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3대 안보 문서의 조기 개정도 추진한다. 방위비를 GDP 대비 2% 이상으로 늘리고, 공격용 무기 수출의 길도 열겠다는 구상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핵무기 보유·제조·반입을 금지한 비핵 3원칙 재검토에 대해서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엄중한 안보 환경을 고려해 핵무기 ‘반입 금지’ 규정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인 것으로 알려졌다.
다카이치 시대 한일 관계는 기존 협력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관측된다. 다카이치 총리는 2월 20일 시정방침 연설에서 한국과 관련해 “현재의 전략 환경에서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정상 간 신뢰 관계를 기초로 솔직한 의견 교환을 통해 관계를 한층 더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낙관적이다. 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명예교수는 “다카이치 총리의 국내 정치 기반이 강화되면서 한일 관계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무라 간 고베대 교수도 “국제 환경이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 관계 기조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했다. 중국과 갈등을 빚는 다카이치 총리가 한국과는 역사·영토 문제 등을 관리하며 양호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