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실시된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전체 465석 중 316석을 확보하며 역사적인 대승을 거뒀다. 선거 전 198석에 머물렀던 의석을 단숨에 118석이나 늘렸으며 단일 정당이 중의원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 건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번 선거는 2024년 10월 중의원 선거와 지난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잇따라 대패하며 불안정한 정국 운영을 이어오던 자민당이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확보하고 본격적인 ‘다카이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총리의 폭발적 인기와 중의원 해산 타이밍이 압승 배경…
성숙한 의회 운영과 경제정책 성과에 향후 정권 안정성 달려
이번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자민당은 참의원에선 여전히 과반 미달의 ‘소수 여당’이다. 하지만 중의원에서 가결된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더라도 중의원에서 재가결하면 법률로 성립시킬 수 있다. 이처럼 강력한 권한을 확보한 다카이치 내각은 총리의 막강한 리더십 아래, 총리 관저와 정부가 의회를 이끄는 ‘정고당저(政高?低)’의 관계를 토대로 ‘강한 일본’을 실현할 정책 추진력을 얻게 됐다.
자민당 압승의 최대 요인은 무엇보다도 다카이치 총리의 폭발적인 인기와 중의원 전격 해산 타이밍에 있다. 지난해 10월 출범 이후 70%대의 고공행진을 이어온 다카이치 내각의 지지율은 선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다카이치는 선거의 명분을 정책 성과에 대한 중간 평가가 아닌 총리 개인에 대한 신임 투표로 프레임화해 국민적 기대를 결집했다. 특히 ‘사나카츠’로 불리는 젊은 팬덤의 열성적인 지지와 SNS를 활용한 선거 전술은 자민당을 구태의연한 정당이 아닌 역동적인 개혁 세력으로 비치게 했다.
반면 야당의 급조된 선거 전략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입헌민주당과 공명당이 합당해 만든 중도개혁연합은 이념과 정책이 다른 정당 간의 ‘선거용 담합’이라는 비판을 극복하지 못해 의석이 167석에서 49석으로 격감했다. 야당은 고물가 등 정부의 실정을 파고드는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지난 1월 23일 총리의 전격적인 중의원 해산 결정으로 야당 간 후보 단일화도 무산되면서 정권 비판표를 흡수하는 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야권은 각자도생의 다당화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당분간 야당 주도의 정계 재편 동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불확실성이 커진 대내외 환경도 자민당의 승리에 기여했다. 강대국 정치의 복귀와 국제질서의 쇠퇴, 고물가와 저성장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 등으로 일본 사회에 위기감이 조성됐고, 이는 보수결집으로 이어졌다. 위기 극복을 위해 ‘정치적 안정’과 ‘정책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다카이치의 주장이 유권자의 심리를 관통했다. 과감한 적극 재정을 지향하는 ‘사나에노믹스’에 대한 지지가 확산됐고 중국의 압박에 굽히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의 이미지가 부각됐다.
향후 다카이치 내각이 장기적으로 안정된 정권으로 거듭날지는 성숙한 의회 운영과 경제정책 성과에 달려 있다. 사나에노믹스로 불리는 다카이치의 거시경제 정책은 과감한 적극 재정과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을 특징으로 한다. 기업의 설비투자, 임금 상승, 소비 확대의 선순환을 목표로 AI, 반도체, 양자 기술, 방위 등의 분야에 대규모 국가 예산과 세제 혜택을 집중하는 전략이다. 문제는 국제정세가 급변하며 유가가 급등하고 있고 이에 따른 고물가와 엔저 압박이 추가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 재정 건전성 확보,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기조와의 조정도 과제로 남아 있다.
‘자위대→국방군’ 개헌, 방위비 상향, 스파이 방지법 제정 추진…
한국, 구조적 갈등 관리하면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전개해야
사회정책 분야에서는 보수적인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일본 국기 및 국가 문장 훼손 시 처벌하는 법 제정, 남계(男系) 천황을 유지하기 위한 황실 관련 법률(황실전범) 개정 등이 추진될 전망이다. 「헌법」 개정 역시 탄력받을 것으로 보인다. 다카이치 총리와 자민당은 전력 불보유 등을 명시한 「헌법」 9조 2항을 삭제하고 자위대를 ‘국방군’으로 명기하는 방안을 중심으로 개헌 발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강한 일본’을 향한 ‘보통 국가화’ 작업이 속도감 있게 추진될 전망이다. 다카이치 내각은 방위비 목표를 현재 GDP의 2%에서 상향 조정하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올해 중에 국가전략 관련 중요 안보 3문서(국가안전보장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를 개정해 살상 능력이 있는 무기 수출을 대폭 확대하는 등 방위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려 한다. 국가 정보 역량을 높이기 위해 2027년까지 미국 CIA를 모델로 한 정보기관 창설과 스파이 방지법 제정을 추진할 예정이다.
다카이치 시대가 개막하면서 우리 대일 외교는 양면성을 지니게 됐다. 일본 정치의 보수화, 다카이치 내각의 수정주의적인 역사 인식과 보수적인 정책 지향은 우리에게 불편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다카이치 정권은 엄중한 국제정세를 고려해 한일 관계와 한·미·일 협력을 중시하고 있으므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총리의 리더십이 강화된 것은 지속 가능하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본의 변화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강한 리더십을 갖춘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익 중심의 냉철하고 실용적인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한일 양국의 구조적인 갈등이 재연되지 않도록 리스크를 관리하면서 상호 존중과 국익 우선의 동반자 관계를 추구해 나간다면 다카이치 시대의 일본은 우리에게 위협이 아닌 새로운 기회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셔틀외교를 통해 최고 지도자 간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자민당 지도부와 유력 인사는 물론 야당 정치 지도자와의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한일 협력이 단순히 양국만의 문제가 아닌 인도·태평양 지역의 안정과 규범 기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축이라는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
과거사 문제는 원칙 있게 대응하되 경제안보, 첨단기술 협력, 인적 교류 등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인 협력 성과를 창출해 관계 개선의 동력을 유지해야 한다. 미중 전략 경쟁의 리스크에 대응하고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 질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공급망, 환율과 고물가, 저출산·고령화, 외국인 노동자, 수도권 집중 및 지방 발전, 농업, 재해 방지 등 양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경제·사회 문제에 대해 긴밀히 협력해 나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