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산업 부활에 대비해 한국은 현재의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기술 자립도를 높이고 국내 반도체산업 생태계를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반도체산업은 과거와 달리 한 국가에서 모든 공정을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한 성장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반도체는 1950년대 말 미국에서 발명됐다. 미국은 군사 및 우주산업을 중심으로 반도체 기술을 발전시키며 초기 반도체산업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일본은 빠르게 반도체 제조 기술을 도입했으나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군사산업이 크게 제한됐다. 그 결과 반도체는 군사 분야가 아닌 가전제품과 같은 민간 산업에서 적극 활용됐다. 소니, 도시바, 히타치, NEC와 같은 일본의 종합 전자 기업들이 TV, 오디오, 컴퓨터 등 자사 제품 생산에 필요한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구조를 구축하며 1970~1980년대 일본의 반도체산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은 세계 반도체시장 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의 경쟁력을 확보했고, 당시 세계 반도체시장의 매출 상위 10위 기업 중 상당수가 일본 기업이었다. 일본은 명실상부 반도체 강국으로 평가받았다.
1980년대 세계 반도체시장 점유율의 절반 이상 차지한 일본,
플라자합의와 기업들의 전략 오판으로 한국 등에 추월당해
일본의 반도체산업이 급성장하자 미국은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1980년대 초반, 미국경제는 무역 적자와 환율 문제로 수출 경쟁력이 약화된 상황이었으며 자동차와 반도체 등 주력 산업 분야에서도 일본 기업들의 공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1985년 일본을 포함한 주요 5개국과 함께 ‘플라자합의’를 체결해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추고 엔화 등의 가치를 높이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986년에는 미·일 반도체 협정을 체결해 일본 기업의 반덤핑 수출을 억제했고, 일본시장에서 미국을 포함한 외국산 반도체 제품의 시장 점유율을 20% 수준까지 확대하는 조항을 추가했다. 그 결과 일본의 반도체산업 경쟁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하게 된 이유가 미국의 정책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980년대 등장한 개인용컴퓨터(PC)는 반도체산업의 경쟁 구조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큰 수익이 발생하는 기존 시장을 포기하지 못했고 시장의 변화를 빠르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삼성전자와 현대전자(현재 SK하이닉스)는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며 메모리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대했고 1990년대엔 일본 기업을 빠르게 추격했다. 결국 1998년부터 반도체시장에서 한국은 일본을 추월하며 현재까지 세계 메모리반도체시장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게 됐다.
한편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하는 동안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 부활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일본 정부 주도로 설립된 엘피다 메모리다. 엘피다는 NEC와 히타치 등 여러 기업의 D램 사업부를 통합하며 출범했지만, 글로벌 메모리반도체시장의 치킨게임과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결국 2012년 파산했고, 2013년 미국 마이크론에 인수됐다.
그러나 일본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완전히 밀려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하던 시기 한국과 대만에서 반도체산업이 시작되면서 일본 반도체 제조장비·소재 기업들은 이들과 함께 성장하고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의 반도체 제조 공급망 핵심 분야에서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은 쇠퇴했으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는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일본 정부는 이러한 경쟁력을 기반으로 반도체산업 부활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 TSMC의 공장을 구마모토 지역에 유치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TSMC 공장을 설립할 때 대규모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쇠약해진 자국 내 반도체 생산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이 공장은 첨단 공정보다는 자동차와 산업용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범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생산할 예정이지만, 현재 일본 제조 기업이 사용하고 있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된다.
또 다른 핵심 정책은 2022년 차세대 첨단 반도체 개발을 위해 일본 정부와 도요타, 소니, NTT 등 주요 기업이 함께 설립한 라피더스다. 라피더스는 부족한 제조 기술력을 미국의 IBM과 협력해 보완하는 등 일본 내에서 첨단 반도체 생산 생태계를 구축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새로운 일본의 경제정책인 사나에노믹스와도 연결된다. 사나에노믹스는 국가 주도로 전략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AI와 반도체는 미래의 일본경제를 성장시킬 핵심 산업으로 지정돼 정부의 정책 지원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 반도체산업, 제조장비·소재 분야 일본 의존도 높아…
자국 기업 우선 공급 시 우리 반도체 공급망 흔들릴 수도
일본의 반도체산업 부활은 여러 측면에서 한국 반도체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현재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선두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제조장비와 소재 분야에서는 여전히 일본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반도체 제조 기업이 일본 기업의 주요 고객이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 관계가 유지됐으나, 일본이 자국 내 반도체 제조업을 확대하게 되면 공급망 구조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일본 기업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 우선 공급할 경우 한국 기업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이 흔들릴 수도 있다.
또한 일본이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첨단 반도체 제조 분야에서 기술개발 성과를 거둔다면 글로벌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구도 또한 변화할 수 있다. 물론 막대한 자금 투입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기술 축적이 필요한 반도체산업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일본의 반도체산업이 단기간에 부활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제조장비와 소재 분야에 경쟁력을 갖고 있으므로 사나에노믹스 추진에 힘입어 정부의 강력한 정책 지원이 이뤄지면 중장기적으로는 그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반도체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일본의 반도체산업 부활에 대비해 현재의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분야의 기술 자립도를 높이고 국내 반도체산업 생태계를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또한 일본과의 경쟁만이 아닌 협력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반도체산업은 과거와 달리 한 국가에서 모든 공정을 처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 해당한다. 따라서 협력을 통해 함께 성장할 방안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