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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소총 하나 없던 국가에서 무기 수출국으로… K방산이 진격한 80년
양낙규 아시아경제 군사전문기자 2026년 05월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4년이 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군사적 긴장감이 전염병처럼 대륙별로 옮겨가고 있다. 미국이 이란을 공습하면서 중동 지역 화약고에 불이 붙었다. 미국의 군사력이 중동에 묶이면서 유럽에는 안보 공백이 발생했다. 유럽은 러시아의 위협을 받게 됐지만 미국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선을 긋고 도움을 거절했다. 유럽은 국방비를 늘려 안보 자립에 나섰다. 중국은 대만을 노리고 있다. 경제적 압박, 회색지대 전술(저강도 도발로 안보 목표를 이루려는 군사행동) 등을 통해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도 다급하다. 중국을 견제해야 하지만 휘청거리는 조선업에 해군력 복원은 쉽지 않다. 국제 안보가 요동치고 있는 사이 K방산의 열기가 뜨겁다.

1970년대 국방과학연구소 설립 등 자체적인 방산 역량 구축하고 
美 미사일 역설계해 만든 ‘백곰’으로 세계 7번째 미사일 개발국 돼

K방산이 태동한 것은 80여 년 전이다. 1948년 당시 정부는 개인화기와 탄약 생산능력을 보유하는 것에 역점을 두고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을 창설했다. 당시엔 마땅한 공장이 없었다. 일본군이 사용하던 조병창이 전부였으나 공장 상태가 열악해 복구조차 힘들었다. 결국 국방부는 유환상공주식회사의 용산공장과 조선유지주식회사의 인천공장을 사들여 일본군 99식 소총의 부속품과 수류탄을 제작했다. 자체 생산을 시작하긴 했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소총 하나 없이 전쟁을 맞닥뜨린 셈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북한 재침공에 대비할 독자적 전략 자산이 전무했다. 미국의 무상 원조로 도입한 총기와 장갑차로 방어선을 간신히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충격적인 통첩도 날아왔다. 1960년대 후반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우방국의 자주국방을 강조하며 대한반도 전략을 수정했고 한국에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내밀었다. 실제로 1971년 주한미군 제7사단 병력 2만 명을 철수하며, 한국전쟁 휴전 이후 6만3천 명 수준을 유지하던 주한미군 병력은 4만3천 명으로 줄어든다. 이러한 안보 환경의 변화 속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 손으로 직접 무기를 만들어 자주국방을 이룩하자”며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했고 1974년 군 전력 증강 계획인 ‘율곡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산업공단(산단)도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 등 15명의 각료를 모아놓고 산단 개발을 지시했다. 이를 위해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과 민석홍 전 대우그룹 전무가 투입되면서 만들어진 게 바로 창원산단이다. 1974년 문을 연 창원산단에 처음 둥지를 튼 방산기업은 기아기공(현 현대위아), 대한중기(현 세아베스틸), 통일중공업(현 SNT다이내믹스), 제일정밀(현 퍼스텍) 등이었다.

우리 군이 국산 미사일을 보유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다. 박 전 대통령은 1971년 1월 28일 국방부 연두순시에서 단거리 전술 유도탄 개발을 지시했다. 당시 ADD에 하달된 사업명은 ‘항공공업 육성 계획 수립’이라는 위장 명칭이었다. ADD를 비롯해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육·해·공군 사관학교의 교관 요원으로 구성된 개발계획단이 꾸려졌다. 국산 1호 미사일은 미국에서 들여온 지대공 미사일 ‘MIM-14 나이키 허큘리스(NH)’를 역설계해 만든 단거리 지대지 탄도미사일인 ‘백곰(NHK-1)’이다. 당시 개발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충남 태안 안흥시험장에서 작은 컨테이너를 임시 사무실로 쓰며 비행시험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어 도보로 이동하는 일이 잦았다. 눈이 많이 오던 어느 날 연구원들이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걸어가는 모습이 꼭 북극곰 같다고 해 ‘백곰 미사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곰은 개발 착수 7년 만인 1978년 9월 시험비행에 나섰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참관한 가운데 발사된 유도탄 백곰은 사거리 200km를 날았다. 세계 7번째 지대지 탄도 미사일 개발국이 된 셈이다. 이후 1983년 10월 북한 공작원에 의한 버마(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이 터지면서 전두환 정부는 국산 미사일 개발 사업에 본격 시동을 걸었다.
 

1980년대 말 국내외 정세 급변하며 ‘한국 방위의 한국화’ 추진…
정부 주도 국방개혁과 맞춤형 수출 전략으로 K방산 시대 열어


1980년대 말 국내외 정세가 급변했다. 국내는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87년 체제’가 들어섰다. 해외에서는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이 변했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8·18 계획’을 수립해 ‘한국 방위의 한국화’를 내세웠다. 미국에 대한 군사 의존도를 줄이고 잠수함과 공군·육군의 무기 개발을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는 군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려는 정책 기조로 방산 개발이 주춤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군 요직에 현역 장성들이 배제돼 방위산업과 군 전략이 일정 부분 정체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김대중 정부는 ‘국방개혁 5개년 계획’으로 군 구조 개편과 전력 현대화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이어 2005년 노무현 정부가 ‘국방개혁 2020’을 발표하며 장기 비전을 마련했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국방개혁 2020’을 고도화한 ‘국방개혁 2.0’을 추진하며 방위산업을 전략적 수출산업으로 본격 육성하기 시작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맞춤형 수출 전략이 K방산의 협상 무기가 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아랍에미리트(UAE)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간 방산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향후 UAE 현지 생산을 통한 제3국 공동수출과 공동생산을 추진할 예정이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전략경제협력 대통령 특사로 먼저 UAE를 찾아 UAE 공군의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도입을 집중적으로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이 양국 간 방산협력 강화를 강조한 것도 KF-21 등 무기체계 공동개발과 현지 생산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당분간 K방산의 열기는 식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종점이 보이지 않고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중동의 화약고까지 터져버렸다. 이런 국제정세에서는 K방산처럼 준비된 국가만이 위기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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