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4년 1월 31일(수) 오후 3시
장소: 세계경제연구원 집무실(서울)
대담: 이지은 『나라경제』 편집주간
PROFILE
미국 UCLA 경제학 박사
1969 ~ 1973 미국 뉴욕대 교수
1982.02. ~ 1983.01. KDI 부원장
1983.01. ~ 1983.10. 산업연구원장
1983.10. ~ 1987.05.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1987.05. ~ 1988.02. 제32대 재무부장관
1988.02. ~ 1988.12. 제33대 재무부장관
1989 ~ 1992 IMF 특별고문
2000.09. ~ 2002.08. 대외경제통상대사
2001.04. ~ 2002.03. 대통령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2003.09. ~ 2007.08. 고려대 석좌교수
2003.09. ~ 2008.02.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
2008.03. ~ 2009.04.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
2009.02. ~ 2012.02. 제27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2009.1 1. ~ 2011.0 5. 대통령 직속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
2019.01. ~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설립자)
미중 패권 경쟁 심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여타 중동지역 충돌 등으로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는 가운데 고물가·고금리가 지속되며 한국경제는 수출·내수 등 전방위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울러 올해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 등 다른 많은 주요국에서도 중요한 선거가 예정돼 있어 그 결과와 영향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보수·진보를 막론한 5개 정부에서 경제수석, 재무부장관 등의 중책을 맡아 대내외 경제 과제들을 두루 관장했던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명예이사장을 만나 세계경제 복합위기 속 한국의 전략에 대해 들어봤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한국경제가 1.4% 성장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내수가 어려운 가운데 수출도 부진해 지난해는 우리보다 훨씬 성숙하고 규모가 큰 미국, 일본보다도 저조한 성장에 그쳤을 뿐 아니라 올해 성장률도 대체로 2% 초반에 머물 것으로 전망되고 있어 걱정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올해 성장률이 2.2%냐, 2.3%냐보다는 향후 5년간, 10년간의 전망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보다 긴 안목으로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일에 국정의 우선순위를 둬야 합니다.
성장잠재력을 올리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요?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개혁과 함께 노동시장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일입니다. 특히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지금, 부모의 부담을 가중해 아이 낳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사교육 의존적 교육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노동시장 유연화로 여성을 포함한 기존 인력의 노동시장 참여를 높이고 이를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에 기초한 각종 규제개혁 역시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이에 더해 앞으로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달리 노동과 자본 투입보다는 경제 전반의 체제적 효율성(총요소생산성)을 높이는 데 더 집중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법과 제도의 선진화를 통한 사회적 자본의 확충과 함께, 입법부·사법부를 포함한 정부 전반의 생산성 향상 노력이 필수적입니다.
국내 경제뿐 아니라 대외 여건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현재 세계경제는 지난해 이맘때 전문가들의 예측보다는 훨씬 선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경제의 소프트 랜딩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고 중국경제도 우려했던 것보다 안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중국을 위시한 주요국에서 경제 논리가 국가안보와 지정학적 고려에 밀리고 있고, 특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에 따른 국제 안보·경제 질서의 혼돈과 붕괴 리스크가 가중되고 있어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돼 온 다자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 세계경제 질서가 이처럼 어려운 복합위기 상황에 처한 것은 처음입니다.
지금같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전 세계 여건과 국내 경제의 저성장 상황 그리고 특히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부가 중요한 경제정책을 효율적으로 수립·집행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각 부처 장관에게 인사권과 보상 권한을 최대한 보장하고 장관을 자주 교체하지 않아 이들이 소신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각 부처는 경제 전체 차원이 아니라 담당 부분을 중심으로 정책을 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 효율성을 올리려면 각 부처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경제정책을 기획·조정하고 총괄하는 기능 또한 강화돼야 합니다. 경제정책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한정된 자원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분하는 의사결정인 만큼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부분이 항상 있기 마련이고, 정책의 효과는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것이어서, 각 부처 등 이해당사자 간의 의견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좋은 경제정책을 채택하고 집행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경제정책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기 위한 전 정부 차원의 각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관련 부처 장차관에서 실무 담당자에 이르는 정책 관련자들이 언론을 통한 국민과의 소통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또한 정부는 시대가 요구하는 중요한 경제정책의 입안·집행과 설득 과정에서 KDI 같은 전문가 집단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1980년대 KDI에 계셨을 때 정부 경제정책의 이해를 돕기 위한 TV 방송을 만드셨다고 들었습니다.
1980년대 물가를 잡기 위해 필요하지만 인기가 없는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를 잘 알리고자 정부 측에서 먼저 KDI에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경제전문가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백화점 등 경제 현장을 찾아가고, 미국·유럽 등 각지에서 세계경제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고, 밀턴 프리드먼 등 유명 인사를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대본도 쓰고, 직접 출연까지 하면서 쉽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했고 이를 황금시간대에 방영해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KDI는 정부의 굵직굵직한 정책·제도 구상 및 입안에 핵심 역할을 해온 것으로만 주로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방송을 만드는 일 외에도 정부와 기업, 학계, 언론계 그리고 여러 사회단체가 참여하는 다양한 정책 협의와 토론, 포럼을 주도하는 등 주요 정책의 대국민 설득과 여론수렴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앞으로 정책 전달 과정에서 KDI의 어떤 역할이 중요할까요?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글로벌 여건에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 대안에 관한 대국민 설득과 여론 수렴에 KDI와 같은 전문가 집단을 활용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언론 환경이 크게 변화한 만큼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그리고 왜곡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경제전문가들이 도움으로써 포퓰리즘 정책이나 가짜뉴스의 입지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민과의 소통에서 이번에 400호를 맞은 『나라경제』의 역할은 어떻게 보시나요?
『나라경제』가 모든 경제부처를 망라하는 정책 이슈를 각 부처 장관, 정책 담당자, 각 분야 전문가를 섭외해 400호에 걸쳐 꾸준히 다룬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일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정책에 대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역할을 『나라경제』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장이셨을 때 『나라경제』와 인터뷰하셨습니다. 지금과 당시의 대외 여건은 무엇이 다른가요?
당시는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지 않았고 위기가 주로 글로벌 경제·금융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미국과 중국이 상호 윈윈하기 위해 국제공조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G20 정상회의를 통한 주요국 간 국제공조가 없었더라면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지구촌의 큰 재앙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세계적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제로섬게임 양상의 패권 경쟁와중에 있어 2010 서울 G20 회의 때와 같은 국제적 공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당시와는 큰 차이입니다.
격화되고 있는 미중 패권 경쟁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이라 보시나요.
이는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2012년 시진핑 중국 주석이 세계에 공표한 ‘중국몽’은 한마디로 2050년까지 중국이 군사력이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고 패권국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현 패권국인 미국이 이를 수수 방관할 리 없습니다. 현재까지의 상황 변화, 다시 말해 미국과 서방국가의 대응과 중국의 국가 자본주의 운용 방식의 변화 등을 감안할 때 중국의 목표가 2050년까지 달성될 확률은 낮아 보입니다. 따라서 양국 간 패권 경쟁은 그보다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지구촌의 지정학적 분열과 공급망의 재편, 나아가 경제 질서의 혼돈 등 세계경제 여건의 불확실성도 앞으로 상당 기간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일한 군사동맹이며 가치동맹인 미국과,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중요한 경제파트너인 중국 사이에서 가치와 원칙을 기반으로 한 설득력 있고 일관된 외교로 우리 국익을 지켜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 등으로 리더십 공백 우려가 제기되는 글로벌경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미중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것은 미국과 중국이 과거 여느 주요 패권 경쟁국들보다도 경제적 상호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경제 각 분야와 이슈 차원의 타협과 협조 소지는 있다는 점입니다. 슈퍼파워 둘만으로는 협력이 어렵겠지만 한국과 같은 미들파워가 나서서 주요 경제·기술 분야 등 양쪽 모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슈로 리더십을 발휘하면 미국과 중국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 세계는 미중 패권 경쟁에 따른 ‘글로벌 리더십 갭’을 메우기 위한 G20의 글로벌 리더십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나서서 G20 주요국 중에서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여러 중견 국가들과 긴밀히 공조해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G20의 집단리더십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개도국을 졸업한 선진국으로서, 다른 선진국들과 대화할 능력도 있고 개도국의입장도 잘 알고 있는 한국에 국제사회가 그런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솔선수범하면서 일관된 원칙과 가치에 기반한, 신 뢰할 수 있고 책임감 있는 국제파트너로서의 위상을 굳혀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라경제』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지도를 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태생적으로 지정학적·지경학적 여건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해야 하고, 주변 초강대국 틈새에서 남다른 국제 정치·외교의 지혜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깊은 세계화로 연결돼 있고, 글로벌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른 세계 경제·안보 질서는 혼돈과 불확실성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 결과 ‘지정학의 경제학 정복(geopolitical conquest of economics)’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을 위시한 주요국의 경제정책 패러다임이 크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특히 국가 경제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경제』 독자들께 재삼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국제적 안목을 기르고 더욱 넓히기 위한 각별한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긴밀히 얽히고설킨 세계에서 국내 정책과 글로벌 정책이 따로 일 수 없습니다. 국제적 안목과 비전 없이 올바른 경제정책은 어느 분야에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