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투자로 압축 성장하는 기업은 보유 지분율에 따라 의결권 배분할 경우
경영진이 의결권 상실해 기업가정신·경영철학 유지 어려워질 수 있어 복수의결권주식 제도 필요
비상장 벤처기업이 누적 투자 100억 원 이상, 그중 마지막 투자는 50억 원 이상 유치하고,
마지막 투자로 창업주 지분율이 30% 이하로 떨어지거나 최대주주 지위를 상실해야 발행 가능
벤처기업의 성장모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규모 투자를 통한 압축적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컬리, 당근마켓 등 누구나 알 만한 벤처기업들이 이런 성장 방식을 채택했다. 대규모 투자는 기업의 빠른 성장을 가능하게 하지만 창업주 등 경영자의 의결권이 급격히 감소하는 부작용이 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보유한 지분율에 따라 기업의 의사결정 권한을 갖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압축적 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일부 기업에는 그렇지 못할 수 있다. 경영진이 의결권을 상실하게 되면 기업의 성장을 이끌었던 기업가정신과 경영철학이 유지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필요한 제도가 바로 복수의결권주식 제도다.
미국·중국 등 벤처 선도국은 이미 도입해 활용 중으로 구글, 쿠팡 등도 나스닥 상장 시 발행
복수의결권주식은 두 개 이상의 의결권이 부여된 주식을 의미한다. 미국, 중국, 인도, 영국 등 벤처 선도국에서는 이미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복수의결권주식을 활용한 가장 유명한 사례로 미국의 구글이 있다. 구글은 2004년 나스닥 상장을 위한 기업공개 당시 1주당 10개의 의결권을 갖는 클래스B 주식을 발행해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등이 소유했다. 국내 상장이 아닌 나스닥 상장을 선택해 논란이 됐던 쿠팡도 창업주인 김범석 대표가 1주당 29개의 의결권을 갖는 복수의결권주식을 발행했다. 코스피가 아닌 나스닥을 선택한 이유가 복수의결권주식 제도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복수의결권주식 발행이 금지돼 있던 우리나라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난 4월 27일 제한적 복수의결권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증권시장에 상장되지 않은 벤처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는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1주당 최대 10개의 의결권을 가진 복수의결권주식을 발행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 법을 근거로 오는 11월 17일부터는 특정 요건을 충족하는 벤처기업이 복수의결권주식을 발행할 수 있게 된다.
벤처기업 복수의결권주식의 발행 요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증권시장에 상장되지 않은 주식회사여야 한다. 이미 증권시장에 상장된 경우 증권시장을 통한 자본금 조달이 가능하고 소액주주 등을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벤처기업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복수의결권주식 제도는 성장성이 높은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받아 지속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됐기 때문에 모든 기업이 활용할 수는 없고 벤처기업에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중소기업이어야 벤처기업이 될 수 있으므로 중견기업·대기업은 발행이 불가하다.
셋째, 창업부터 복수의결권주식을 발행하는 시점까지 누적 100억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해야 하고, 그중 마지막 투자는 50억 원 이상이어야 한다. 넷째, 마지막 투자로 인해 창업주의 지분율이 30% 이하로 하락하거나 최대주주 지위를 상실해야 한다. 여기서 창업주란 해당 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서 마지막 투자를 받기 직전까지 30% 이상의 의결권을 보유한 최대주주를 의미한다.
복수의결권주식을 실제 발행하기 위해서는 회사의 자치규범인 정관을 수정해야 한다. 정관에는 복수의결권주식을 발행할 수 있다는 뜻과 받을 자의 자격 요건, 발행 절차, 발행할 복수의결권주식의 총수, 1주당 의결권의 수, 존속기간 그리고 일정한 경우 보통주식으로 전환된다는 뜻을 담아야 한다. 정관의 개정은 발행주식 총수 중 75%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정관 개정 이후 실제 발행을 위한 의사결정도 주주총회를 거쳐야 하는데, 정관 개정과 동일하게 발행주식 총수의 75% 동의를 통해 발행한다.
존속기간 최대 10년, 상속·양도 등의 경우 보통주로 전환…창업주의 사적 이해관계 걸린 사안은 적용 제한
복수의결권주식의 남용을 방지하고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제한사항도 존재한다. 먼저, 복수의결권주식의 존속기간은 최대 10년이다. 이는 복수의결권주식을 통해 영구적인 지배권을 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둘째, 복수의결권주식은 일정한 경우에 하나의 의결권을 갖는 보통주식으로 전환된다. 존속기간의 만료, 상속, 양도, 창업주의 이사사임의 경우 그리고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에 편입되는 경우 즉시 보통주식이 된다. 벤처기업이 증권시장에 상장하는 경우 상장한 날로부터 3년과 남은 존속기한 중 짧은 기간으로 존속기간이 축소된다.
셋째, 이사의 보수, 감사의 선임 및 해임, 이익배당 등 창업주의 사적 이해관계나 주주이익과 관련된 안건에는 1주마다 1개의 의결권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한된다. 넷째, 복수의결권주식을 발행한 벤처기업은 그 내용을 비치 및 공시해야 하고, 중소벤처기업부에 보고해야 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보고받은 내용을 관보에 고시해 국민이 투명하게 알 수 있도록 관리한다. 마지막으로, 위반 사항에 대해 직권조사가 가능하고 과태료 및 형사처벌 조항도 도입된다.
우리나라의 복수의결권주식 제도는 오랜 기간 치열한 논의 끝에 도입됐다. 오남용을 우려해 많은 제약이 있는 상태로 도입됐으나 경영권 상실의 위기에 처한 창업주들에겐 가뭄의 단비와도 같을 것이다. 복수의결권주식 제도가 대규모 투자를 촉진해 혁신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