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삶의 질을 바꾸는 과학기술 발전은 국경을 뛰어넘는 연구자 간의 협업과 연대를 통해 이뤄져 왔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 자리하고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그 대표적 예다. CERN에서는 세계 각국의 최고 과학자들이 모여 우주 탄생의 비밀과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의 신비를 밝히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현재 80여 개국 600여 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2006년부터 연구자들을 파견하고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지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CERN의 연구자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강입자가속기를 이용해 ‘신의 입자’라 불렸던 ‘힉스입자’를 비롯해 59개의 새로운 입자를 발견했다. 또한 가속기에서 입자들의 충돌로 생성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연구자 간에 공유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월드와이드웹(WWW)’을 고안해 전 세계가 연결된 인터넷 세상을 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CERN 사례에서 보듯 글로벌 R&D는 한 국가나 기관 등 단독으로 R&D를 진행할 때 부딪칠 수 있는 지적·물적·시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훨씬 탁월한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강점이 있어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최근 11년간 노벨과학상의 90%가 공동수상이었으며, 그중 80%가 수상자 간 협력연구의 결과물이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대부분 ‘나 홀로 연구’에 머물러 있다. 정부 R&D 예산 규모 중 국제공동연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1.9%에 불과하다. 글로벌 대학평가기관인 영국 QS(Quacquarelli Symonds)에 따르면 세계 대학 종합순위에서 41위인 서울대와 56위인 카이스트도 국제공동연구 부문에서는 각각 세계 401위와 662위에 머물러 있다.
기초연구, 상향식 체계 접목해 해외 공동연구 기회 늘리고
국가전략기술·탄소중립기술은 국가 차원에서 육성
이에 정부는 소규모·단발성으로 이뤄지던 국제협력 연구체계에서 벗어나 글로벌 R&D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만들고자 한다. 그간 미뤄왔던 글로벌 R&D 혁신을 시도하는 첫걸음으로 지난 11월 27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제3차 전원회의 심의를 통해 ‘세계를 선도하는 글로벌 R&D 추진 전략’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글로벌 R&D 체계를 상향식(bottom-up)과 하향식(top-down) 투 트랙으로 확대 및 개편한다. 기초연구에서는 그동안 글로벌 R&D의 주를 이뤘던 상향식 체계를 접목한다. 기초연구의 글로벌 전환을 통해 해외와의 공동연구 기회를 확대하는 한편, 기술패권 경쟁 대응의 핵심인 국가전략기술 분야와 기후위기 대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탄소중립기술 분야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하향식으로 추진한다. 또한 글로벌 R&D 성과를 확산하기 위해 외국과의 공동실증과 국제표준 개발 지원 등으로 역할을 확대할 계획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글로벌 R&D에 3년간 5조4천억 원 이상을 투자해 전체 정부 R&D 예산의 1.9%에 불과했던 글로벌 R&D 예산의 비중을 6~7% 수준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이와 더불어 한미일 공동으로 분담금을 적립하고 필요할 때 유연하게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가칭)글로벌 브레인 네트워크’ 프로젝트를 신설해 인도·태평양 지역과의 전략적 협력을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국가 간의 상이한 R&D 집행시스템을 고려해 상대국 상황에 맞춰 글로벌 R&D를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도록 회계연도 이월을 허용한다. 기간과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사업을 포괄할 수 있는 프로그램형 사업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이러한 글로벌 R&D 투자가 전략적으로 이뤄지도록 특허, 논문 등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하는 ‘글로벌 R&D 전략지도’를 분야별로 마련한다. 이를 토대로 국가전략기술 분야와 탄소중립기술 분야의 글로벌 R&D 플래그십 프로젝트를 발굴해 예비타당성조사 패스트트랙을 도입하거나 예산을 우선 배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신속하게 지원한다. 또한 해외 현지의 우수 연구그룹과의 공동 R&D를 수행 또는 지원하는 ‘글로벌 R&D 전략 거점센터’를 운영하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산하에 ‘글로벌 R&D 특별위원회’를 신설해 전 부처의 역량을 결집할 계획이다.
둘째, 데이터를 기반으로 국가전략기술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연구기관을 분석 및 매핑(mapping)해 우수연구자 유치나 공동연구를 진행할 상대방 우선 섭외 등에 활용한다. 또 젊은 인재들에게 글로벌 경험의 기회를 폭넓게 제공하기 위해 각 부처에 흩어져 있는 연수지원 사업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체계화해 확대하고, 국내외 최정상급의 전략기술 연구기관 간 연합플랫폼을 구축해 인력교류에 활용한다. 역량이 우수한 재외 한인 과학자들을 유치해 국내 신진 연구자들과의 공동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협업 기회도 확대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에서 수행하는 개인 기초연구의 글로벌 협력활동을 폭넓게 지원할 수 있도록 글로벌 네트워킹, 공동연구센터 설치 및 운영, 인력교류, 특수 혹은 고가의 연구 시설 및 장비 공동 활용 등의 글로벌 트랙을 신설·전환한다. 탁월성이 입증된 기초연구실, 선도연구센터 등 집단 기초연구의 경우도 글로벌 R&D 형태로 추진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전략적 기술협력 위해 국가 간 협력 채널 강화
마지막으로, 전략적 우선순위에 기반한 기술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공동 프로젝트, 상호 인력교류 등의 논의가 오갔던 한미 간 차세대 핵심·신흥 기술(CET; 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y)에 대한 국가표준전략 대화 등의 고위급 회담과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국제기구를 통해 기술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분야를 도출해 이를 추진할 사업을 새롭게 기획한다. 시장 선점의 핵심이 되는 국제표준을 선제적으로 개발하고 표준 전문가의 국제활동도 적극 지원해 나가 국제표준의 리더십을 확보한다.
이 외에도 해외의 우수한 연구기관이 우리 정부 R&D에 주관·공동 기관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해외 자원을 능동적으로 활용하게끔 한다. 글로벌 R&D를 수행하는 현장의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지식재산권 공동 소유 기준, 연구비 관리, 연구 참여 방식 등의 내용이 담긴 가이드라인도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할 계획이다.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상품이지만 자국의 시장만을 고려한 규격과 표준을 사용해 글로벌 경쟁에 뒤처지는 현상을 ‘갈라파고스 증후군(Galapagos Syndrome)’이라고 한다. 뛰어난 창의력과 두뇌를 갖춘 우리의 젊은 연구자들이 갈라파고스 증후군을 겪지 않고 처음부터 세계와 함께 연구하고 도전하며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든든한 조력자가 되고자 한다. 대한민국 연구자들의 무한한 가능성이 더 큰 세계를 만나 세계 최고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