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함정들 가운데 지휘관이 탑승하는 배를 기함, 다른 말로 플래그십이라고 한다. 특별한 깃발(flag)을 달기 때문에 생긴 명칭으로 함대 내에서 가장 크고 빠른 배가 플래그십으로 운용된다. 최근에는 단어의 용례가 확대돼 특정 브랜드의 대표 매장을 플래그십 스토어라 칭하기도 하고, 한 기업의 대표 브랜드 또는 한 국가의 주력 산업을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조선산업은 한국의 대표 주력 산업이다. 우리나라 1, 2, 3위 조선사는 그대로 세계 1, 2, 3위 조선사로 이어진다. 조선산업은 명실상부 한국의 플래그십 산업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조선산업은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 다시금 호황 사이클에 올라탔다. 전 세계적으로 역대 최다 선박 발주를 기록한 직후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가하락 등으로 발주가 급감했고, 특히 2016년 한국 조선산업은 이른바 ‘수주절벽’이라는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와 해상 물동량 증가에 힘입어 오랜 시간 절치부심해 온 한국 조선산업의 르네상스가 시작됐다는 평가도 들려온다.
이러한 회복세는 각종 지표로 확인된다. 올 1분기 우리 조선산업은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선과 암모니아선을 모두 싹쓸이 수주하면서 3년 만에 중국을 제치고 세계 1위를 탈환했다. 1분기 우리 기업의 수주액은 136억 달러로 같은 기간 중국의 126억 달러에 비해 10억 달러가 더 많다. 수출 또한 지난 7월 이후 8개월 연속 플러스를 기록하고 있고, 수주잔량도 4천만CGT(표준환산톤수) 이상으로 이미 4년 치 일감을 확보했다. 올해 우리 조선 업계는 수익성 높은 선박 위주로 선별 수주하면서 경영여건 또한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환경이 녹록지만은 않다. 중국 등 후발 경쟁국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가파르게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대형 LNG선을 수주하는 등 고부가가치 선박시장에서 우리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고 메탄올, 암모니아 등 친환경선박시장에서도 이들과의 경쟁이 예상된다.
한편 일본과 EU 등 과거 조선산업 강국은 미래 신시장으로 자율운항선박시장에 주목하면서 잃어버린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메구리(MEGURI) 2040 프로젝트’를 통해 자율운항선박시장의 선점을 꾀하고 있다. EU도 10여 년 전부터 대규모 자율운항 공동연구를 지원하고 있으며, 조선 기자재 강국인 핀란드, 노르웨이 등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자율운항선박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외부와의 경쟁뿐 아니라 내부적으로 해결할 과제도 적지 않다. 지난해 우리 조선산업은 충분한 일감을 확보했음에도 생산인력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초 비자제도를 개선해 해외인력을 긴급 투입하고 국내인력 양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국내외 조선업 인력양성센터 운영해
생산인력의 안정적 확보 지원
그리고 지난해 11월 정부는 우리 조선산업이 국내외 과제를 해결하고 차세대 조선시장을 주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K조선 차세대 선도 전략’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①미래 초격차 기술 확보, ②제조시스템 고도화, ③법·제도 기반(인프라) 정비 등 3대 정책 방향을 제시했으며, 이 같은 전략의 가시적 성과를 연내 조속히 창출하기 위해 지난 3월 ‘K조선 차세대 이니셔티브’를 발족했다. 이 자리에서 산업통상자원부(이하 산업부)는 HD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등 대형 조선 3사 및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와 ‘K조선 초격차 경쟁력 확보를 위한 공동대응 협약’을 체결하고, 민관이 원팀이 돼 당면한 문제를 함께 헤쳐나갈 것을 다짐했다.
먼저, 정부와 기업은 5년간 9조 원을 집중 투자해 우리 조선산업의 세계 선도 지위를 공고히 하고 미래 핵심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세계 최대 액화수소 운반 시험선 건조, 세계 최고의 액화이산화탄소선 및 메탄올선 핵심 기자재 개발 등 친환경선 분야 기술개발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방침이다.
또한 자율운항 분야에서는 규제 샌드박스를 활용, 세계 최초 1,800TEU급 컨테이너선의 국제항행 시범운항을 실시하고 실증 레코드를 확보해 자율운항선박시장 선점에 박차를 가한다. 생산 기반의 경쟁력 강화도 계속될 계획으로, 공정 효율화를 위해 소블록 자동 생산, 도장 자동화, 협동로봇 개발 등 세계 최고의 생산시스템 개발을 지원한다. 이를 위해 산업부는 산학연과 함께 ‘K조선 테크 워킹그룹’을 운영해 연내 ‘K조선 초격차 R&D 로드맵’을 수립할 예정이며, 미래 핵심기술 요소 진단과 정부 예산 편성을 연계해 미래 초격차 선도기술을 조속히 확보해 나갈 것이다.
둘째, 체계적인 인력수급시스템을 마련한다. 먼저 중장기 인력전망시스템을 구축, 수주량·업황 등 주요 요인을 수시로 점검해 매년 초 인력전망을 발표할 계획이다. 또한 ‘미래혁신인재 양성센터’를 운영해 매년 2천 명의 국내 조선 분야 전문·생산 인력을 양성하고, 현장 맞춤형 채용 연계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다. 외국 인력의 역량 제고와 지속 가능한 수급을 위해 해외 현지에서 조선인력센터를 시범 운영하고, 기업 수요에 발맞춰 임금 요건, 업력 기준, 직종 확대 등과 관련한 비자제도의 개선도 법무부와 협력해 지속 추진할 방침이다.
셋째, 조선산업 종사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최근 업계에 훈풍이 불고 있지만 일부 중소형 조선사와 기자재 업체들은 마음껏 돛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중소형 조선사들의 원활한 수주를 지원하기 위해 관계기관과 선수금 환급보증(RG) 발급 확대를 지속 논의하고 있으며, 무역보험 보증요율 인하 및 보증비율 상향도 추진할 계획이다.
중소형 조선사의 미래 경쟁력 강화도 지원한다. 디지털·친환경 전환 등 중소 조선사의 사업 재편을 적극 돕기 위해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에 따른 ‘조선업 상생 협의회’를 구성해 운영할 계획이고, 대형 조선 3사는 ‘기술자문단’을 가동해 친환경 중소형 선박 기술개발과 컨설팅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근로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생산 현장별 맞춤형 보건·안전·환경(HSE) 솔루션을 마련해 생산 현장의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최첨단 안전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시설도 마련할 것이다.
조선산업 밀집지역에 현장애로 데스크 운영
마지막으로, 조선산업에 친화적인 산업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법·제도 인프라도 개선한다. ‘K조선 차세대 이니셔티브’를 정례화하는 한편 기술·상생·공급망 등 분과별 얼라이언스를 구성하고 중점 과제들을 빠짐없이 발굴해 속도감 있게 추진하며, 이행상황도 꼼꼼히 점검해 나갈 예정이다. 업계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해 산업부는 조선산업 밀집지역 5곳을 중심으로 ‘조선산업 현장애로 데스크’를 운영하고 산업부 실무진을 전담관으로 지정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챙겨나갈 방침이다.
현재 한국 조선산업의 플래그십은 단연 대형 LNG선이다. 지금 이 순간 전 세계 바다를 누비는 대형 LNG선의 75%는 한국에서 만들어졌다. 30년 전 우리 조선 업계가 첫 LNG선을 건조할 때만 하더라도 LNG선시장의 주인공은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한 덕분에 일본을 포함한 다른 경쟁국들은 이제 한국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탈탄소·자율운항이라는 패러다임 전환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향후 100년을 결정지을 중차대한 시점이다. 산학연관이 원팀으로 힘을 합쳐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응함으로써 자율운항선박, 수소추진선박 등 미래 플래그십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깃발을 품고 넓은 대양을 항해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